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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오는숲 May 25. 2021

내 마음속의 F1 레이싱

비행소설07

셔틀버스에 기장님 보다 먼저 올라타서 맨 앞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대화를 원하는 기장님은 내 옆자리에 앉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자리에 앉아 각자 편히 가면 된다. 기장님이 먼저 타고 내가 따라 타게 된다면? 나는 무조건 기장님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 처음 만났을 때 무조건 자기소개를 날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무것도 아닌 듯 하지만 미국 시민권을 가진 부기장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들은 신경도 안쓸 듯하다. 갑자기 이런 것을 신경 쓰는 나만 루저가 된 기분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A기장님은 예상대로 내 뒷자리에 앉으셨다. 그 뒤로 승무원들이 깔깔거리며 요란스럽게 셔틀버스에 올라탄다. 또 뭐가 저렇게 재밌을까. 난 편안한 자세로 스마트폰으로 최신 기상과 사용 활주로를 확인한다. 브리핑 때 봤던 자료랑 크게 다르지 않다. 넥타이가 목을 조이는 듯하여 느슨하게 풀어 재끼고 눈을 감는다. 스르르 잠에 빠져든다.


불안한 기운에 눈을 뜨니 어느새 공항에 도착했다. 몸이 긴장모드로 돌입한다. 뒤를 돌아 기장님을 본다.


“먼저 가시겠습니까?”

“천천히 갑시다.” 


항공기에 도착해서 할 일이 많은 승무원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내리자는 것이다. 승무원들은 한바탕 요란하게 셔틀버스에서 내린다. 무슨 짐이 저렇게 많은지 알 수가 없다. 동남아로 갈 때는 옷이 얇으니 내 레이오버 백은 민망할 정도로 텅텅 비어 간다. 앉은 채로 보니 오늘따라 승무원들이 차고 있는 알록달록한 애플워치가 많이 눈에 띈다. 옅은 향수 향기를 남기고 빠른 걸음으로 공항 속으로 사라진다.


부기장을 갓 달았을 때는 셔틀버스에서 빨리 내리지 못해 안달이 났었다. 항공기에 빨리 가서 셋업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시간이 있어야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셋업 할 때 실수를 덜 하게 된다. A기장님은 실수를 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은 분명했지만 실수가 잦아지면 크류 간의 신뢰가 깨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공항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가족 단위로 놀러 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다들 상기된 모습이다. 온갖 형형색색의 캐리어 가방들이 공항 바닥을 질주한다. 크류들은 빠른 걸음으로 승객들을 요리조리 피해 입국장으로 들어선다. 정면에 보이는 대형 전광판에서 우리 비행편의 정보를 찾아보려 했지만 이상하게 찾을 수가 없다. 기장님도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보시긴 했는데 확인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비행에서는 게이트가 바뀐 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한참 동안 공항 바닥을 걸어 다녀야 했었다. 이번에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미 전광판이 시야에서 벗어났다. 마지막으로 게이트를 버스에서 확인했을 때도 그대로였으니 괜찮을 것이다.


“먼저 들어가 있어요. 따라 들어갈게요.”


기장님은 아마도 면세담배를 사러 가시는 것 같다. 요즘 담배값이 많이 올라서 나도 살까 잠깐 고민하다가 관둔다. 가끔씩 친척이나 지인들의 담배 심부름을 하거나 선물로 사놓는 경우가 있다. 조종사로 일하고 있지만 버디 티켓도 없고 좌석을 업그레이드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가족, 친척 및 지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힘없는 근로자다. 그래서 담배라도 싸게 사다 줘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곤 한다. 하지만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를 권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별로였다. 더군다나 자칫 잘못하다간 줄이 긴 곳에 걸려서 시간을 다 뺏기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요즘은 그냥 항공기로 바로 간다.


터미널 창 밖으로 보이는 오늘 내가 탈 항공기의 HL Number를 확인하고 브리지로 걸어 들어간다. 브리지 창 사이로 조업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마치 F1 레이싱 경주의 피트 스탑을 보는 듯하다. 오늘은 국제선이라 좀 여유가 있지만 국내선은 20분의 짧은 턴어라운드 시간 안에 다음 목적지로 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사람들이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게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바로 이 턴어라운드 시간을 10분으로 단축해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물론 혼잡한 공항을 피하고 독자적 항공권 판매, 지정 좌석제 폐지 등 여러 가지 혁신을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항공기는 승객을 태우고 하늘에 떠야 돈을 벌기 때문에 그라운드 타임을 줄이는 것이 수익에 미치는 영향이 꽤 클 것이다. 와! 어떻게 10분이라는 시간 안에 승객을 태우고 다시 출발할 수 있지? 뜨거운 여름에는 브레이크 쿨링도 해야 할 텐데 말이다. 믿기지 않는다.


항공기에 들어서자 아노다이징 처리된 알루미늄 특유의 금속 냄새, 제트 연료 냄새, 객실 시트에 씌워진 오래된 패브릭 냄새 등 온갖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른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이질감을 느낀다. 원래 인간이 하늘을 난 다는 것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이모님들은 노련한 몸짓으로 객실 청소를 하고 승무원들은 비행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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