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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는 이유

브레네 브라운, ≪마음가면≫의 한 문장

by 김바리
경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내가 ‘온 마음을 다하는 삶'에 관해 연구한 12년 동안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질문에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세운 나름의 원칙이었다.

- 브레네 브라운, ≪마음가면≫ (더퀘스트, 2016)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말보다 글이 편했다. 그렇다고 해서 글 쓰는 솜씨가 뛰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게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언어를 다루는 데 말보다 글이 더 편했다는 말이다.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이따금씩 엄마가 묻는다. “너 서랍에 있는 편지들은 언제 버릴 거니?”


이게 사연이 또 있다. 청소와 정리를 좋아하는 우리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무렵 책상 한쪽 구석에 모아뒀던 편지통을 처분하셨다 (나의 동의도 없이!). 당시 느꼈던 상실의 슬픔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조금은 남아있다. 그런 내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아시는지, 옷방 서랍 가장 아랫칸에 고이 넣어둔 편지 꾸러미만큼은 아직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셨다.


언제부터 편지 쓰는 걸 좋아했던 걸까. 꾸러미를 펼쳐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하나씩 열어 보면 내용 참 별거 없다. 대체로 그 당시에 친구가 뭘 했는데 어땠다, 나는 이걸 했는데 좋았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 등등. 지금 생각해 보면 충분히 말로 해도 되는, 시시콜콜한 휘발성 멘트들인데 꼭 편지에 글로 써서 배 모양, 하트 모양, 카드 지갑 모양으로 건넸다. 아마도 받았을 때부터 기분이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유년 시절 나는 지금보다 더 내향적인 편이었기에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거나, 방과 후 함께 무언가를 하면서 놀자고 제안조차 제대로 하지 못 했었다. 그런 소심한 성격의 내가 누군가에게 애정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우리만의 이야기를 몰래 주고받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에게나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자칫 ‘이상할 수 있는' 생각들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들려주고 싶었다. 그 수단이 나에겐 편지이자, 글쓰기였다.


글을 쓴다는 건, 내가 당당하게 내 취약성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마음의 탈출구이다. 혹자는 온라인에 자신의 어두운 과거의 경험, 가족과의 이야기, 마치 일기 같은 정말 사적인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꽤 오래전부터 적당한 거리의 타인에게 나의 어두운 면을 기꺼이 드러내 왔기 때문일까. 그런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거리낌이 없는 것 같기도 (이 또한 재능이라면 재능일까요, 어둠을 기꺼이 드러내는 글을 쓰는 재능, 그런 재능이 세상에 있을 리 없습니다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드러내고 싶지만 조금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글로 드러내지 못한 내밀한 나의 어두움이 존재하지만, 요즘 들어 이 또한 나의 일부이지 않은가, 하는 마음과 함께 언젠가는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공개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모두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다 가지고 있어. 정말로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떤 역할을 선택하는 가야. 그게 우리의 진짜 모습이란다.”

- 영화 ≪해리포터≫ 에서 해리의 대부 시리우스 블랙의 대사


“다양한 채널에 글을 많이 쓰고 있는데 힘들지 않아?”


네이버 블로그에 일기를 쓰고, 일주일에 한 번 에세이를 쓰고, 이제는 매일 아침 글을 써보겠다는 선언을 하자 언니가 한 말이다. 그런데 정말, 하나도 힘들지 않다. 오히려 즐겁다.


매일 글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한 가지 새로운 기쁨을 마주했는데, 그것은 바로 밖을 거닐 때 이어폰을 끼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이 왜 기쁜 일인가 하면 조금 더 세상을 눈으로, 귀로, 코로, 또렷하게 담기 위해 신경을 쓰게 됐기 때문이다. (자의적이자 강제로) 매일 글을 써야겠다 다짐한 이후로 내가 보든, 듣는 것, 나누는 대화, 맡는 냄새 그 모든 것이 잠재적 글감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어제는 미팅을 가는 길에 지하철 지하상가 과일가게에서 포도 두 송이를 샀다. 샤인머스켓을 달라고 하자 사장님은 네,라고 대답하고는 내 옆에서 우두커니 서 계셨다. 우리 둘은 나란히 서서 잠시 샤인머스캣 바구니들을 멀뚱히 비라보았다. “아, 제가 고르는 건가요?”라 묻자, 사장님은 당연하다는 듯 “네! 그럼요”라고 대답했다.


낯선 사람과 나란히 서서 기분 좋아지는 것을 빤히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그 기분 좋아질 무언가를 선택하는 자유가 나에게 주어진다는 것. 포도 두 송이를 먹는 것뿐인데 이렇게 즐거운 일이 될 수 있구나,라고 미팅 장소로 걸어가며 포도가 든 검은 봉지를 괜히 앞뒤로 흔들어 본다.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적당한 경계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매일 아침 글쓰기 챌린지 DAY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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