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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 있는 사람

무라카미 하루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문학동네, 2012) 중

by 김바리
교훈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딱딱한 게 아니다. 어떠한 일에도 반드시 교훈이 있고, 그것은 꼭 모두 같은 형태라고 할 수 없다. 내리는 비 속에도 교훈이 있고, 옆집 주차장에 세워진 코롤라 스프린터에도 교훈이 있다. 억지로 찾아내려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문학동네, 2012)



내 멋대로 하루키 아저씨는 ‘그것이라면 질색입니다'라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교훈에 대한 비호감을 드러낼 줄 알았다. 그런데 교훈이 있는 이야기를 비교적 좋아한다니. 구체적으로는 교훈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은근히' 좋아한다고 말한다.


세상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며 교훈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케이스 스터디 삼아 어떤 편집자의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준다. 재즈 뮤지션과 편집자의 열 마디 남짓한 대화에서 하루키 아저씨는 무려 9개의 교훈을 발견해 냈다. 이 얼마나 유쾌하고 귀여운 아저씨란 말인가. 그러고는 자신이 찾아내지 못한 교훈이 있다면 가르쳐 달라며 독자에게 참여를 유도한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읽고 있노라면 뭐랄까, 미지근한 물에 담긴 갓 만든 두부랄까, 가래떡이랄까 그런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평소에는 굳이 간절히 찾지 않지만 어쩌다 보니 눈앞에서 갓 뽑아낸 두부가 ‘먹어 본 맛이지만, 후회하지 않으실걸요'라고 말을 하듯 미지근한 물속에서 부드럽게 유영하며 모락모락 김을 내는 것이다.


그의 이 모락모락 하고 적당히 따끈따끈한 두부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나의 뱃속 컨디션 또한 중요하다. 이미 속세의 화려함으로 가득 채운 후엔 도무지 입에 가져가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허기진 상태에선 한입에 바로 배를 거뜬히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조금 부족하게 식사를 마치고 두세 시간이 지난 후 적당히 허기진 때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가장 평범한 별미이다.


그의 글은 밋밋한 하루에 약간의 소금기를 더해준다. 비록 지속 시간이 길지 않더라도 잠깐의 생기를 되찾게 해 준다. 그 비결은 그의 유머 감각에 있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웃기려고 하지 않는데 웃긴 상황들, 심각한 이야기인데 ‘그랬답니다, 어쩔 수 없죠’라며 가볍게 내뱉는 아쉬움과 한탄, 때때로 정말 솔직한 감정 표현 ‘다른 게 아무리 싫다 해도 그것처럼 싫은 건 없다 (자유업의 문제점에 대하여)’. 하루키 에세이가 주는 이 적당히 가벼운 삶의 무게는 그의 문체와 더불어 조금은 서툴러 보이는 (어쩌면 의도된) 삽화와 어울려 더욱더 재치 있는 무엇인가가 된다.


출처 무라카미 하루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문학동네


마침 오늘 아침에 뽑은 밑미 긍정 카드의 메시지가 ‘재치(Wit)’였다. 재치란 적절한 말과 행동으로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지혜를 말한다. 경직된 상황에서 핵심을 파악하는 통찰력으로 적절한 말과 행동을 전달해 경쾌한 상황과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재치라 한다. 그런 면에서 에피소드 속에서 하루키 아저씨가 독자에게 교훈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이 방식은 참으로 재치 있다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난 오늘의 나의 교훈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루키 에세이는 적당한 공복에 갓 내놓은 두부와 같습니다.





유려한 문장이나 치밀한 심리묘사는 읽을 당시에는 감탄스러울지언정 세월이 흐르면 모조리 잊히고, 아주 사소할지라도 좌우지간 효율적인 종류의 것만 부분적으로 기억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문학동네, 2012), 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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