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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두려움

앨런 와츠, ≪불안이 주는 지혜≫속 한 단락

by 김바리
당신은 두려움 가운데 있다. 그래서 용감해지고자 한다. 그러나 용감해지고자 하는 노력은 두려움 자체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두려움일 뿐이다.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평화로워지고자 하는 시도는 다리미로 파도를 잠재우려는 시도와 같다.

- 앨런 와츠, ≪불안이 주는 지혜≫ (마디, 2014)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마주하지 않으면서 약간의 병리적인 마음의 문제가 생겼다. 가면 증후군이었다. 가면 증후군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이 뛰어나지 않다고 여기며 불안감을 느끼는 마음으로, 언젠가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다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상이다. 먼 나라에서 생활하며, 큰 조직 안에서 지내며 그들의 경험, 말과 행동, 가지고 있는 인맥, 여가를 보내는 방식이 나와 다른 것을 체감하며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데, 어쩌다 운이 좋아서 함께 있게 된 거야.’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취했던 태도는 ‘침묵하기'와 ‘피하기' 였던 것 같다.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선택들에서 나의 아비투스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기에 말을 아꼈고, 제안을 거절했다. 마치 더 고상한 취향이 있는 것처럼, 마치 당신들이 모르는 나만의 세계가 있다는 듯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콧대를 혼자서 세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자주 외톨이가 되었다. 그런 경험을 더 겪고 싶지 않아 책을 읽었고 관계에 대해, 성공에 대해, 처세술에 대해 선인의 지혜를 익히려 노력했다. 여기서 또 문제가 있는데, 쉽고 빠르게 읽히는 자기 계발서 위주로만 책을 읽다 보니 나의 배움에 Why는 사라지고 What과 How만 남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맥락 없는 ‘긍정적인 사고와 행동'에 집착했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별일 아니라는 듯 감정의 서랍 속에 꼭꼭 넣어두었다. 긍정적인 감정이 들 땐 몸집을 부풀려 이곳저곳에 보여주려 애썼다. 감정들이 가져다주는 본질적인 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못한 채, ‘좋은 감정은 나누고, 안 좋은 감정은 숨긴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기쁨을, 설렘을, 불안을, 두려움을 마주했다.


불안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거기에 맞서지 말고 불안과 하나가 돼라.
- 앨런 와츠, ≪불안이 주는 지혜≫ (마디, 2014)


최근 몇 개월 사이 읽었던 영성 도서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불안이라는, 두려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과 맞서려 하지도, 피하려 하지도 말 것.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것. 작가 앨런 와츠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불안과 하나가 되라고 까지 말한다.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부정적인 감정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나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어렴풋하게나마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다. 책에서 저자가 신체 활동과 정신 활동이 따로 떼어진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과 몸은 분리해서 다루지 않는다는 맥락의 마음과 몸이 하나라는 동일시를 전제하는 유물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기도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몸과 정신이 하나인지, 둘로 분리되어 있는지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느끼는 대로 두어라'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불안을 느낄 때, 불안을 피하려 하지도, 맞서려 하지도 말고 ‘나는 불안을 느끼고 있구나’라고 느끼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보고 듣는 것을 자꾸만 해석하려 한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이런 태도가 나를 현재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하고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일지도 모른다. 정신도 신체도 쇠약해져 가는 동안 나를 보존하려는 본능이 점점 더 강해지기 때문일까.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이 책에서는 (다른 영성 도서와 마찬가지로) ‘열린 마음'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책을 가볍게 일독하고 난 후 나에게 남은 생각은 이것이었다.


Dear. 앨런 와츠 님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라고 하시는 말씀, 아주 잘 새겨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현재인 걸까요? 1시간? 하루? 일주일? 3개월? ‘지금 이 순간'이라고 하면 1분? 1초? 현재라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라면 나의 현재는 6개월 단위로 끊어도 될까요 와츠 님?’



손은 손 자체를 움켜쥐려는 노력을 그만둘 때 자유로이 잡을 수 있고, 눈은 눈 자체를 보려는 시도를 그만둘 때 자유로이 볼 수 있으며, 사고는 사고 자체를 생각하고자 하는 행위를 멈출 때 비로소 자유로이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자유로이 느끼고 보고 생각할 때 삶은 삶 자체를 완성시킬 미래나, 삶 자체를 정의할 설명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는 깨끗이 사라진다.

- 앨런 와츠, ≪불안이 주는 지혜≫ (마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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