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중 한 단락
나는 지금도 가끔, 조용히 숲 속으로 사라져 버린 야생의 수고양이 피터를 생각한다. 피터 생각을 하면, 내가 아직 젊고 가난하고 두려운 것을 모르고 대체 앞으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그 당시에 만난 수많은 사람 역시 떠오른다. 그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중 한 사람은 지금도 나의 아내이며, “있잖아, 장롱 서랍을 빼냈으면 제발 제대로 좀 끼워 넣어"하고 저쪽에서 외치고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문학사상, 1999)
도쿄에서 유학 생활 삼 년 차가 되던 시절, 나는 학교보다 츠타야 이케부쿠로 점과 동네 도서관을 더 자주 드나들었다. 적응을 못했다고 말하면 그랬던 것 같고, 아마도 귀국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학교를 다녀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후 해석이기에 당시에 어떤 생각으로 학교를 가지 않았는지는 그때의 나만이 알 것이다 (당시엔 일기도 잘 쓰지 않아 기록도 없다. 진실은 저 너머에).
어느 날 어김없이 학교를 빼먹고 달콤한 햇빛을 맛보기 위해 도서관 마당 벤치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었다. 뒤쪽에서 새끼 고양이가 야옹야옹 우는 소리가 들렸다. 출처가 좀체 파악이 되지 않아 요리조리 풀더미를 살펴보고 있자니 지나가던 경비원이 ‘며칠 전부터 들리더군요. 데려가 키워보든지’라고 무심히 말을 던지고 사라졌다. 고양이를 찾는 와중에 이미 머릿속에서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차였는데, 깔끔하게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다. 수풀 속에서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했다. 나의 첫 아기 고양이.
고양이를 데리고 왔을 때 같이 살던 룸메이트들은 꽤나 놀라는 눈치였지만, 금세 작은 동물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고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무모한 행동이다, 이기적인 나를 이해해 준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고양이는 냠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내가 살던 다가구 주택 1층에는 안방에서 바로 뒷 베란다로 연결되는 문이 있었다. 타고난 야생성은 버리지 못하는지 냠냠이는 그곳을 통해 자주 외출을 했다. 처음엔 반나절, 이윽고 하루, 이따금 외출한 후 일주일 만에 돌아올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일주일이 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진짜로 길로 돌아갔구나' 싶어 자식을 출가시키는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하며 섭섭함과 안도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어느 날 새벽, 세상이 아직 파란색이었을 때 밖에서 야옹야옹 애처롭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냠냠이가 돌아왔다. '다시 돌아와 줬구나', 그때의 뭉클한 느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을 했고, 냠냠이는 그 집에 두고 오게 되었다. 나중에 듣자 하니 친구들이 이사 갈 무렵, 누군가에게 입양을 보내려고 함께 외출했다 도망을 갔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이별이었을까. 아니면 도망가지 않고 입양을 가는 게 나았을까.
그때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그 죄책감은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일부가 되어 지금의 옹구와, 구찌와의 매일의 일부를 이룬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을 각오해야 함을, 나는 경험으로, 동물들과의 삶에서 깨달아가고 있다.
목걸이에는 이름이 쓰여 있다. 주인에게 귀여움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부르면 방긋하고 웃지만 오지 않는다. 언제나 온화하게 행복스레 양지에서 볕을 쬐고 있다. 내 마음의 친구.
- 무라카미 하루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문학사상, 1999)
케임브리지의 페이앳 가에 살고 있는 고양이 사진 밑에 하루키가 적은 이 짧은 글은 그에게 고양이가 어떤 존재인지 잘 설명해 준 문장이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다. 내 마음의 친구 옹구찌. 앞으로 이들이 나와 함께 할 시간이 햇수로 몇 년일지 가끔 손가락을 접어 세어보다가 접기 싫어져 이내 포기한다. 오래오래 같이 함께 했으면 좋겠지만 욕심이겠지. 어제는 옹구가 한참을 화장실에 앉아서 앞다리를 꿇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옹구는 요로계 문제가 있어서 자주 오줌을 못 싸곤 했는데, 최근에 다시 심해진 듯하다. 부랴부랴 요로 건강 영양제를 주문했다.
말하지 않는 동물이기에 인간과 함께 하는 장점도 있지만 이럴 때는 답답하다. ‘요즘 나 방광이 불편해'라든지, ‘사실 나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아'같이 미리 말을 해주면 참 좋으련만. 한편으론 말을 못 해서 더 사랑받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굳이 말로 안 했으면 좋은 그런 상황. 주인이 딱 봐도 너무 게으르게 해가 중천에 떠있도록 침대에 퍼져있다든지, 밤늦게 야식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작작 자고 그만 일어나 (라는 표정)’ , ‘으휴 한심하게 이 시간에 치킨에 맥주냐(라는 표정)’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 것으로 충분한데 거기다 말까지 하면 꽤나 상처받을 것 같다(왠지 고양이에게 자주 삐지지 않을까).
내 멋대로 마음의 친구와 대화하는 방법이랄까. 표정의 변화라곤 딱히 없지만 가끔 수염의 방향이나 꼬리의 모양, 대답하는 억양(진짜로 있다)으로 그들의 기분을 파악하곤 한다. 이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내가 더 잘 관찰하고 더 잘 들어야 한다. 어제의 옹구를 보면 나는 여전히 부족한 대화 상대이지만, 그래도 본 것을 못 본 척, 들은 것을 못 들은 척하는 친구는 아니니 나를 믿어주시라, 내 마음의 친구 옹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