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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리 May 26. 2024

세 번 죽은 여자

[나위쓰 2기] 감정을 중심으로 회고하는 글쓰기 14주차


1년 후, 어느 봄날의 오후였다. 서윤은 창가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그녀의 책상 위에 놓인 키보드를 반짝이게 했다. 서윤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새로운 사진 프로젝트 기획안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그때, 컴퓨터에서 이메일 알림음이 울렸다.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한 것이다. 발신인을 확인한 서윤의 손이 멈칫했다. 진우였다.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지만, 이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메일을 열어보았다.



"서윤에게

오랜만이야. 잘 지내고 있니?

다음 달에 작은 갤러리에서 전시가 열리는데, 거기에서 내 영화도 상영하려고 해. 너의 동의가 필요할 것 같아서 연락했어. 네가 많이 상처받은 걸 알아. 정말 미안해. 이번에는 네 허락을 구하고 싶었어. 우리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어.

연락 기다릴게.

진우가."



서윤은 잠시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영화 상영이라니. 1년 전 자신이 모르는 사이 영화가 상영되어 받았던 상처가 되살아났다. 그 영화를 본 사람들 앞에서 다시 그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서윤의 안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분노였다. 그녀는 진우에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진우에게,

네가 궁금해하는 그녀는 이미 죽었어.

지난 1년 동안 네가 알던 그녀는 서서히 사라져 갔지.

이제 그녀는 너에게 답장할 수 없어.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고 너 자신의 삶을 살아가.

안녕."



하지만 이내 지난 몇 년간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서윤은 노트북 모니터를 닫았다. 떨쳐내기 힘들 것만 같던 좌절과 상처에서 벗어나, 조금씩 자신을 치유해 나가던 과정들. 새로운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자신에게 지금 이 행위가 올바른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개명. 그것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그때의 자신까지 모두 떠나보내는 의식이었다.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렇다. 나는 이미 달라졌어. 더 이상 누군가에 의해, 과거에 의해 흔들리지 않아. 나는 나의 삶의 주인공이야.

서윤은 임시보관함을 열어 자신이 쓴 메일을 삭제하고, 진우의 메일을 차단했다. 그에게 다시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과거에 매몰되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갈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지난날의 아픔은 이제 추억 저편의 일이 될 것이다. 상처는 아물었고, 이제는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내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환한 미소가 서윤의 얼굴에 번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빛났다. 그녀는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새 이름으로 시작될 새로운 프로젝트, 새로운 삶에 대한 설렘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이 작품에서 등장한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건물, 제품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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