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거리두기
저는 감정 기복이 굉장히 심한 편이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감 없이 표현해오곤 했죠. 가족들은 저의 그런 모습을 ‘연구 대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저의 매몰찬 말과 행동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많이 울리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과거의 저는 지금보다 많이 미성숙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으면 화를 내기 일쑤였고, 섭섭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을 상대방의 행동을 지적하며 자존심을 해치기도 했으니까요. 아직도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일련의 경험들과 소위 ‘나이를 먹었다’ 말하는 시간의 흐름으로 성격은 전보다는 많이 둥글 둥글 해진 편인 것 같습니다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죄송합니다).
저의 MBTI는 INFJ입니다. 오늘 글을 쓰기 전에도 해보았는데 2022년 버전 MBTI 테스트는 뭔가 더 고도화된 버전의 것이 있어서 해보니 INFJ, ENTP, ENFP, ENFJ의 성향을 골고루 가지고 있더라고요. 아무래도 페르소나를 잘 장착하다 보니 그때그때 둘러싸인 상황에 따라 대처하고, 그것이 설문에 대답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ENTP 유형은 처음 나와서 조금 당황스러웠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제가 파악한 저는 예민함이 심하게 발동할 때 J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예민해서 J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J력이 어떠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강제로(?) 떨어지게 되어 P가 되면 예민해지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요. 자꾸 MBTI에 너무 과몰입한 것 같으니 잠시 현실로 나와서 이야기하자면, 상황에 휘둘릴 때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예민함이 더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매번 상황을 나에게 맞출 수도 없고 그리고 상황에 나를 매번 맞추자니 스트레스받고. 이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이 반복되다 보면 우울해지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일과 관계에서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위와 같은 일들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시키는 실무를 야무지게만 하면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신입 때와는 달리 연차가 올라갈수록 예기치 못한 이슈를 해결해야 하는 책임감의 무게가 커져갔고 저는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었거든요.
업무에 있어서 어떤 한 목표에 몰입하기 시작하면 스스로 엑셀을 밟기 시작하면 브레이크를 잘 못 밟는 편인 데다가, 또 업무를 부여받고 내가 진행하는 일의 방향이 옳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혼자서 끙끙 싸매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 서로 공유하지 않은 것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힘들었던 적이 있어요. 대부분의 일에서는 몸도 안 좋아지고 정신 건강도 안 좋아지고, 저에게 좋은 과정과 결과를 가져다 주진 않았습니다.
일도 일이지만 직장 내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타인보다 민감한 사람>의 작가 일레인. 아론은 예민한 사람이 직장 생활을 할 때 주의해야 할 점 몇 가지를 조언해 줍니다. 그중 이 부분은 제가 최근에 경험으로 겨우 체득한 내용을 말로 풀어주고 있어서 엄청 공감이 되더라고요.
감수성이 풍부해서 다른 사람들과 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힐 수 있다. 직장에서는 특히 그런 점을 조심해야 한다. 일을 할 때는 경계선을 분명하게 그을 필요가 있다. 덜 민감한 사람들과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깊은 감정을 나누는 친밀한 관계는 직장 밖에서 구하자.
이밖에도 기본적으로 사교 생활하는 데 지키면 좋을 기본적인 조언도 잊지 않습니다.
그냥 한담을 할 때 - 이야기를 할 것인지 귀를 기울일 것인지 결정한다. 자연스러운 시작을 위해 몇 가지 구체적인 질문을 하자. 만일 대화가 지루해지지 않게 스스로 이끌고 가려면 미리 당신이 좋아하는 화제로 시작해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운다.
부탁을 해야 할 때 - 가능하면 필요하다고 생각한 순간에 바로 부탁을 한다. 중요한 부탁이라면 미리 메모를 준비하자. 상대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다양한 반응에 대비해서 누군가와 미리 연습할 필요가 있다. 많이 쉬워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마음의 준비는 된다.
물건을 팔 때 - 솔직히 매우 민감한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물건을 직접 팔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아이디어나 창의적인 작품을 팔거나 직장을 구하면서 자신을 선전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 갖는다고 생각하자.
불만을 표시할 때 -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대비해야 한다. 분노는 가장 자극적이다. 단지 누군가 화를 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긴장할 수 있다.
작은 모임으로 만나자 - 어느 모임에서 조용히 있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거부하거나 모임을 떠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듣는 것만으로도 그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하자. 그 모임에 대해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자.
조금은 정치적으로 행동하자 - 직장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거나 생각을 함께 나누지 않으면 냉정하거나 거만하거나 괴짜로 보일 수 있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좋다. 적절한 때에 자연스럽게 또는 공식적으로 사람들에게 당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 느끼는 좋은 감정을 표현하자. 아무리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더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모를 수 있다.
사실 윗 내용은 지금도 계속 고민이긴 했거든요. 주어지는 일의 범위가 넓어지고 매니저 역할이 점점 더 커지면서 부득이하게(?) 업무에 대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명하는 자리를 갖게 되고 또 윗 분들이랑 자주 대화를 해야 하고 이런 과정들이 어쩌면 누군가에겐 정치적인 행위로 비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고민 (참 걱정이 많죠?). 그런데 이렇게 오히려 예민한 성향의 사람들은 조금은 정치적일 필요가 있다고 딱 -! 조언을 해주시니 (?) 마음 놓고 정치적인 사람이 되어보려고 합니다. 하하하하.
일상에서 일로부터 관계로부터 이렇게 거리를 두는 만큼 저에게는 시간적인 정서적인 틈이 생겼습니다. 그 틈을 그대로 두는 것도 좋지만, 혼자 있을 때 십분 발휘되는 J 성향 상,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동안은 몇 가지 자기 계발 성격을 가지고 있는 활동들로 저의 여가 시간을 채워왔다면 약 일, 이년 전부터는 정말 온전히 나에게 쉼을 줄 수 있는 활동들로 여가 시간을 채워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중 나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명상 시간, 그리고 운동 시간은 제 안에 쌓여있는 걱정과 불안을 비워주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평일에 하루에서 이틀 정도는 꼭 퇴근하고 일과는 전혀 관련 없는 활동으로 즐거운 경험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잘 안 풀리는 부분을 만나거나 어떤 모종의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을 꼭 인간관계나 일에 비유해서 떠올리곤 하는 직업병... 인지 성향인지 하하.
그러고 보면 저의 예민함을 돌보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 계기가 있어요. 그건 바로 나의 사랑스러운 고양이들. 첫째 고양이 ‘옹구’와 살 때만 해도 이만큼 안정적이진 않았습니다. 2020년 겨울, 나에게 온 두 번째 고양이 ‘구찌’는 이듬해 겨울까지 저에게 생명을 지키는 데 필요한 책임감의 무게를 느끼게 해 주었어요. 당시 임신한 상태로 저에게 왔던 구찌와 구찌의 아가들을 돌보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그런 어려운 상황들을 헤쳐가는 과정에서 관계 맺음, 책임, 사랑 등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된 것 같습니다.
시작은 MBTI로 해서 눈가 촉촉하게 고양이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어보는, ‘예민하지만 자극은 필요하니까’ 시리즈. 아직 ‘예민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MBTI 만큼 크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어쩌면 MBTI는 16가지 유형에 어딘가 하나에는 다들 해당이 되니 바이럴 요소도 있어서 금세 빵! 하고 뜬 것도 있겠죠? ‘예민함’에 대한 고민을 가진 분도 또 많지도 않을 거 같고요.
어렸을 때부터 “넌 너무 소심해.”, “넌 뭐 그런 거 까지 신경 쓰니?”, “네가 좀 예민한 것 같아.”, “이기적인 것 같아.” 등의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지금도 대인 관계에 서툴고 일에 있어서도 유연하지 못 한 부분도 많고 또 스스로가 어려운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봐 주는 가족들과, 내 돌봄을 필요로 하는 고양이들, 그리고 나를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는 책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내 위치를 다 잡고,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오늘 내가 부족하고, 또 아쉬운 일들이 있었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당신의 예민함은 분명 좋은 방향으로 쓰일 것이고, 오늘보다 내일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들이 찾아올 거예요. 당신의 예민함의 힘을 믿습니다. 나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