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기록하기
저널이 먼저였는지, 어제일기가 먼저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몰스킨 노트에 저널을 꾸준히 쓰기 시작한 것은 2020년 7월 무렵입니다. ‘어제일기’ 또한 7월 27일 월요일에 처음 노션에 기록하기 시작했네요. 아마도 이때쯤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서로 일기를 다시 써보자며 의기투합하였고, 또 <문장수집생활>을 쓴 이유미 작가의 몇몇 에세이를 감명 깊게 읽었던 것 같아요.
이유미 작가는 아침에 출근하면 알람을 맞춰 놓고 어제 있었던 일을 기록한다고 하였습니다. 감성적인 군더더기는 빼고 그냥 있었던 일만 간략하게 썼는데 그것이 좋은 습관이 되고, 또 나중에 에세이로 쓸 소재가 되기도 했다고요.
저는 장기 기억력이 굉장히 나쁜 편이에요. 특히 누군가와 같이 어떤 장소에 가서 무엇을 했다는 사실을 잘 까먹는 편입니다. 이유가 뭘까 하고 곰곰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추측하건대 첫 번째 이유로 유년 시절에 보기 싫은 모습과 겪기 싫은 일들을 억지로 머릿속에서 지우는 연습을 하다 보니 좋은 기억까지 잘 까먹는 머리가 되었다는 가설 (이 가설에는 나의 큰언니도 일부 동의하였습니다만).
두 번째 이유로는 혼자서 하는 경험은 경험하기 전부터 경험의 마지막까지 모든 의사결정이 나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집중도도 높고 관심도도 높아 기억이 잘 되는 반면,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이나 이벤트는 경험 그 자체보다 함께 하는 사람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라는 것. 눈치를 많이 보는 성향이라서 사람에게 신경 쓰느라 그 외의 것은 별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 또한 뭐 크게 중요하지 않고 어쨌든 문제는 기억력이 나쁘다는 것인데요. 최근에야 알게 된 것입니다만 사람은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을 더 오래 간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과거를 반추해보았을 때 거의 대부분이 향수보다는 후회와 아쉬움이라는 감정이 과거를 대표하는 키워드였어요.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미련,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들로 우울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의 골을 깊게 느낀 시기가 2020년 중순이었고요. 팬데믹이라는 시기적인 비극까지 겹쳐져서 우울감과 고독감이 극에 달할 무렵에 나를 심연에서 조금씩 조금씩 끌어올려준 것이 바로 이 ‘기록’이었습니다.
‘어제일기’에는 정말 딱 사실적인 키워드 중심의 내용만 적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겪었던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에 감상까지 적어내려면 그만큼 생각하는 에너지가 필요하기도 하니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경험한 일을 이벤트 중심으로 글로 잡아두자는 취지에서였어요.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을 적다 보면 어차피 실시간으로 느꼈던 감정의 농도는 옅어지기 마련이었고요.
이렇게 ‘사실 중심’의 일화를 기록하는 것의 장점은 어떤 일련의 사건을 겪을 당시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킨 사건일 경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그 일을 반추해 글로 적어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안 좋게만 볼 일은 아닌 경우도 더러 있더라고요. 확실히 격앙된 감정을 빼고 좀 더 내 앞에 벌어진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 때 ‘미라클 모닝’이라 불렀던 (이제는 아침 일찍 쓰지 않는 일이 허다하기에 이름의 가치를 잃었습니다만) 저널은 주로 하루를 긍정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다짐이나 목표 중심으로 적어왔습니다.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글로 잡아두는 과정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의식의 영역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내는 이 의식은 하루가 다르게 변덕스러워지는 저의 흥미와 관심을 한 방향으로 잡아두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년 8개월이 지난 지금, 2020년 7월과 지금의 저의 현실은 비슷합니다. 그 사이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하여 비슷한 직무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고, 아주 잠시 연애를 했지만 동일한 거주지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싱글라이프를 향유하고 있으며, 책을 읽고 간간이 달리기를 합니다. 감사하게도 주변 사람들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고요.
하지만 달라진 것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기록을 꾸준히 하기 시작한 이후로 책을 더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기록을 통해 내가 원하고 있지만 멀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기 전에 계속 떠올리게 되었고,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배움을 더 부지런히 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교육비 지출이 상당히 늘었다는 것은 반대급부이지만).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이전에 기억에만 의존할 때에는 자꾸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부정적인 미래를 그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일기와 저널을 통해 미래를 낙관하고 나를 신뢰하고, 또 과거의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꾸준히 반복함으로써 조금 더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록의 힘’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증언을 듣기만 해서는 절대 체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5분이든 10분이든, 그리고 일상을 보내는 동안 찾아오는 어떤 ‘아하!’적인 모먼트이든 잠깐의 기록들을 매일매일 쌓아나가다 보면 그 힘을 언젠가는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저 역시 그런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고, 이 기록의 은혜가 내일, 1 년 후, 5년 후, 저를 어디로 데려다 줄 지 너무나 기대가 됩니다. 어느 곳일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곳은 분명 제가 계속해서 꿈꾸고 있는 그 어딘가 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요.
오늘의 이 기록도 아마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그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단락을 적었는데, 정말 현실이 되었네!’라고 말하게 될 과거의 흔적이 될 것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