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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바리 Mar 24. 2022

그녀의 '무엇인가'가 부디 아주 편안한 것이기를

시몬느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고

 한창 이직을 준비 중이라 사람인 공고를 자주 들여다 봅니다. 제 고향을 배경으로 느리게 흘러가는 삶을 담는 유튜브 채널이 있는데요. 그 곳에서 새로 PD를 뽑고 있더라고요. 근무지 김제, 그리고 계약직. 마음에 걸리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물 아홉 살 때처럼 무턱대고 도전 할 순 없어', '김제까지 내려가야 하는 건가? 그럼 엄마 아빠랑 같이 살다보면 또 스트레스 받고 그런 거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 생각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제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엄마 아빠도 언젠가는 돌아가시겠지. 나는 그때까지 여전히 서울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겠다고 소홀히 하다가 두 분이 사라지고 나서 후회하겠지?'.


내게 엄마는 늘 곁에서 살아 있는 존재였다.
언젠가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나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의 죽음은 그 탄생처럼 내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시간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혼자서 '엄마도 이젠 돌아가실 연세가 되었어.'라고 중얼거려본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다른 많은 말들처럼 아주 공허한 말에 불과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나는 마지막 판결만 잠시 유예된,
죽은 엄마를 보았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약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이라는 것을 마주하는 사람의 비일관된 모습들이 딸의 시선을 통과하며 건조하면서도 때론 애처롭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만의 서정의 시대를 막 거쳐간, 삼십 대 중반의 제가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과도 같았어요. 그래서 더욱 몰입하며 읽어 내려갔던 것 같습니다.


 글이나 말로 접한 것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을 때 이미지가 잘 그려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 어떤 것은 글로만 보아서는 좀체 머릿 속에서 어떤 심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죠. 저에게 제 어머니의 죽음과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의 그녀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아요. 어쩌면 그려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요.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나도 엄마처럼 저 속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이야.
 그게 아니라면 너무나 불공평할 테니까 말이야.

 책을 읽어내 가면서 감정이 툭 터져 오르려 할 때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다 죽는 걸 뭐. 그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니까. 나의 어머니도 죽고 나도 죽을 테지. 너무 슬퍼하지 말자.' 라며 가슴속 울렁거림을 억누르려고 했습니다. 간신히 얇은 막을 통해 감싸고 있던 감정의 물결을 팍 터뜨려 버리는 보부아르의 말을 통해, 나는 어머니의 미래의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임에 있어 현재 무엇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다 살았기 때문에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해 죽는다.


 나는 나의 어머니의 죽음을 만든 것이 그녀의 육체, 마음, 규율과 금기로 인한 억압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삶으로 살아가는 데 지금이라도 내가 조금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향에 내려가 계약직으로 일하는 건 고민이 되는 일이기에 포기해버렸습니다.


나는 나의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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