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품에서 찾은, 나를 돌보는 시간
할 일은 언제나 넘쳐난다. 나를 돌보는 일조차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건너뛰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어느샌가 문득, 위기감을 느꼈다. 최근에 한 브랜드의 모닝 챌린지를 시작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15-20분 동안 하루를 계획하고 실제로 어떻게 보냈는지 회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벌써 2주가 지났는데, 생각보다 내 일상에 주는 영향이 크다.
무엇보다 '해야 할 일'에 초점을 두기보다 '나를 돌보기 위해 오늘 작게라도 무언갈 하나 해준다면?'이라는 질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이 루틴을 통해 정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신체 활동, 작은 습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주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달리기 연습을 느슨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아침에 산책을 해보기로 했다. 어제는 아침 루틴을 마치자마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귀에 아무것도 꽂지 않고, 아무 자극에도 노출되지 않은 말끔한 눈과 귀와 코로 여러 가지 자연의 다채로움을 담고 오겠다는 다짐을 했다.
공원을 돌며 가장 많이 담은 색깔은 회색과 더불어 갈색 빛을 띈 초록 잎들, 그리고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그들의 춤사위 너머로 보이는 하늘색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새들의 지저귐의 리듬에 맞춰 풀잎들이 춤을 추듯 나부꼈다. 걸음을 늦추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가득 들이쉬고 내쉬어 보았다.
문득, 최근에 읽었던 미셸 르 방 키앵의 에세이 <자연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이 떠올랐다. 과학자인 그는 숲속 산책이 주는 혜택을 신경생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2004년 일본 니혼의과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숲에서 걸은 집단의 부교감 신경 활동이 100퍼센트 증가했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농도는 16퍼센트 감소했다고 한다.
이러한 과학적 연구 결과는 우리가 느끼는 자연 속 충만함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실제 우리 몸에 일어나는 생리적 변화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느낀 벅찬 감정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집에 돌아와 강신주 작가의 <감정 수업>을 펼쳤다. 이 책에서 작가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의 원형을 고전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설명한다.
특히 수치심에 대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강신주는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발생할 수도 없는 감정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추어도 자신의 행동이 당당할 때, 그러니까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을 때, 우리는 자존감, 혹은 자긍심을 느끼게 된다."라고 말한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 나의 감정적 마비를 깨운 것은 숲속 초록이었다. 아침 햇빛에 반사된 다채로운 초록을 우러러보며, 모두가 함께 흔들리고 있지만 그 모양은 모두 제각각이고 나름대로 열심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경험은 일종의 경외감으로 다가왔고, 이윽고 찾아온 감정은 슬픔과 내 슬픔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의 필요성이었다. 나는 왜 초록을 보며 인간을 생각하고, 이윽고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꼈을까?
젊음을 잃어가는 삶이 슬픈 이유는 젊었을 때 하는 행동에 일종의 당위성을 부여받는다는 착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늙어가면 그 당위성은 점점 사라지고 늙음으로 주어지는 어떤 일련의 의무나 책임 같은 것만이 자리 잡는다.
하지만 이러한 문법이 식물에게는 통하지 않는 듯하다. 감각하는 모습 그대로 식물처럼 늙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초록을 보고 수치심을 느끼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주적 관점에서 옳고 그른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선택한 감정에 따라 사는 것이 내 삶의 정답이라고 믿고 싶다. 강신주 작가가 제안하듯 우리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왜? 자긍심과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더 자주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타인들을 더 자주 곁에 두고 그들의 시선을 느끼는 기회를 기꺼이 누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풍요롭게 하고, 나이듦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늙음을 식물보듯이 하련다. 나는 지금 익어가는 낙엽이려나. 부디 내가 떨어진 자리에 새로 난 잎들이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며, 오늘도 나를 돌보는 작은 실천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