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의 기쁨과 슬픔

나는 이제 빨래를 사랑하기로 했다

by 김바리


설거지를 좋아합니다. 언제부터 설거지를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분명 시골에서 지내던, 어렸을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본격적으로 ‘설거지라는 집안일을 좋아한다’라고 선언하기 시작한 시기는 20대 후반, 오산에서 언니와 함께 지내던 때인 것 같습니다.


어학연수를 가기 전 비자를 받고 출국하기까지 대기하는 시간이 있어 오산 언니 집에 6개월 정도 머물렀었습니다. 당시에 아이방으로 쓰이던 방을 흔쾌히 내어준 형부와 언니 덕분에 (그리고 조카 호연이 덕분에) 저는 아주 편하게 백수의 신분으로 지낼 수 있었죠.


뭐라도 도와야겠다 싶었겠지요? 4-5 명의 식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집안일은 요리는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빨래라, 이 또한 당시 건조기가 없었던 하하호호맘 하우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그래서 택한 (집안)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안)일의 기쁨: 설거지


“나는 설거지를 좋아해.”


나의 큰언니는 가족에게 매우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백수의 신분으로 월세도 내지 않고 식비도 내지 않는 저에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다만 조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바라는 정도만 저에게 기대를 하였죠 (이것도 사실 기대하지 않았을 수도요). 궁금한 게 많은 호연이와 갓난쟁이 하영이와의 그때의 시간이 지금까지 조카들과 저의 유대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준 중요한 계기였을지도 모릅니다.


언니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는 헌신적인 사람이기에, 본인이 하겠다고 했겠지요. 아, 기억이 났습니다. 당시 나의 언니는 손에 습진이 쉽게 생기곤 했어요. 그래서 설거지하는 것을 어려워했고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녀가 싱크대 앞에 서 있는 나에게 미안해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시작한 것이요. “언니, 나 설거지 좋아해.”


“나는 설거지를 좋아해.”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은 아닙니다. 집안일 중에 제일 ‘덜 싫어하는’ 것이기는 하니까요. 몇 년의 “설거지 좋아해.” 선언을 외치며 고무장갑을 끼는 경험을 거듭하는 동안, 제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이번에 가족 캠핑을 다녀오면서, 설거지 가방을 메고 더러웠던 그릇을 깨끗이 씻어 담아 캠핑사이트로 돌아가는 동안, ‘그러고 보니 나 왜 설거지 좋아하지?’ 하며 곰곰 생각해 보았어요.


첫째로, 눈치를 안 보고 혼자 있을 수 있어서. 설거지하는 동안 도와주겠다고 누군가 옆에서 거품질을 하거나 헹구기를 하면 이상하게 더 불편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 혼자만의 시간을 침해받았다는(?) 기분이 들어서이지 않았을까 하는 감히 건방진 생각을 해봅니다.


둘째로는, 뭔가를 했을 때 확실히 비포앤애프터가 확실히 눈에 띄는 집안일이기에. 빨래나 청소, 물건 정리는 설거지에 비하면 비교적 극적인 차이를 체감하기 어려운 집안일 같아요. 더러워졌던 그릇들이 뽀득뽀득 깨끗하게 닦인 모습에 꽤나 큰 성취감을 느끼는 편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이 또한 ‘눈치를 안 보고’의 전제가 붙는 것인데요. 바로 ‘멍 때릴 수 있어서’입니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뇌가 끊임없이 이런저런 생각들로 분주한 와중에 멍을 때릴 수 있는 여유는 특히 평일에는 더 소중한 시간 같습니다.


멍을 때리다 보면 고민이 많이 되던 문제에 대한 해결법이 갑자기 떠오를 때도 있고,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아하’의 순간을 가질 수 있는 건 정말 행운인데 말이죠. 요즘 집에서 요리를 안 해 먹다 보니 설거지도 안 하게 되고, 집에서 조차 잠자는 시간외에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생각했는데, 어쩌면 ‘설거지를 하지 않아서 이지 않은가’ 하는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와 봅니다 (그래도 많은 경우의 수 중에 하나에는 해당하지 않을까요?).



(집안)일의 슬픔: 빨래


나에게 슬픔을 주는 집안일 1위를 꼽으라면 단연 ‘빨래’입니다. 빨래는 너는 것도, 개는 것도, 섬유유연제를 넣기 위해 세탁기 앞으로 잠시 가는 과정까지 모두 재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빨래가 설거지처럼 재미있어질까요?


이번에 캠핑장에서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한 설거지처럼, 장소를 옮기면 빨래가 재미있어질까요? 무인 세탁기에서 이불 빨래의 경험을 반추해 봅니다. 힘들고, 무겁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어요. 아, 그 시간에 기다리는 동안 맞은편 파리바게트에 앉아 책 읽으며 브런치를 먹었던 기억은 좋았지만요.


그렇다면 시간대를 다르게 해 볼까요? 보통 평일 저녁에 이르게 퇴근한 날에 한 번, 주말에 한 번 빨래를 하는 편입니다. 아침에 한다면 어떨까요? 동네 주민들이 싫어할 것 같습니다. 낮에 한다면 어떨까요? 글쎄요.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지만 그중에 만들기 어려운 (하기 싫은) 습관의 경우 만들기 쉬운 (하고 싶은) 습관과 함께 하면 효과가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과 엮어볼까요? 예를 들면, 빨래 돌리는 날은 와인을 마신다. 아차, 그리 좋은 아이디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혼술만 더 늘 것 같아요.


빨래를 돌리는 날과 개는 날의 저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며 묘안을 짜내어 봅니다.


(1) 빨래를 돌리는 날은

집에 일찍 와야 한다 → 집에서 시간이 많다 → so, 영화를 본다? (맛있는 걸 먹으며)


(2) 빨래를 개는 날은

입을 옷이 없다 → 개는 동안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 → so, 재밌는 팟캐스트를 듣는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어 봅니다.


빨래 돌리는 날 → (기다리는 동안)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영화 보기
빨래 개는 날 → (개는 동안) 존잼 꿀잼 라디오, 유튜브 콘텐츠 듣기


부디 이것이 나에게 빨래를 사랑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제 막 빨래가 끝난 옷들을 널으러 가봐야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했음에도 빨래는 사랑해지지 않고, 폰만 더 많이 보고 살만 찌는 건 아닐지 염려도 되옵니다만. 행복해졌으면 된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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