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의 품격

by 마음돌봄

아차차.

어둠 속에서 급하게 종이를 찾았다.

이건 예상 못한 반격이다.

메모장을 늘 준비하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될 줄이야.

집에서 일을 하다가 뭔가가 떠오르며 기록장을 펼쳐서 키워드라도 적어놓는데

이곳은 극장이라 방법이 없다.

순간 스마트폰을 열어 기록할까 하는 양심 없는 생각이 떠오른다.

과연 저 대사를 기억할 수 있을까 몇 번이고 되뇌어 보지만

분명 영화가 끝나면 잊어버릴 것이 뻔하다.



평소에 작은 포스트잇과 볼펜은 꼭 넣어서 다니는데 왜 그날따라 준비가 안되어 있었을까.

하다못해 영화 포스터를 미리 챙겼더라면 이처럼 낭패 보는 일은 없었을 텐데.

작가들을 보면 메모의 중요성,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알고 있으면서도 까맣게 잊을 때가 있다.

영화를 보다가 메모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순간순간이 메모의 연속이다.


이거다. 이 글감으로 써야겠다 하는 순간에 반드시 어디든 키워드라도 써야 한다.

사람의 기억이란 믿을 녀석이 못되어서 순식간에 휘발되기 마련이다.

한 마디, 한 문장만 적어놓아도 차후에 심폐 소생할 수 있지만

손에 아무것도 없어서 적지 못하는 순간엔 아쉬움만 한가득이다.



쉽게 읽히는 글, 재치 있는 글을 쓰는 작가 김민식도 블로그에 몇 년 동안 써놓은 글로 책 한 권을 썼고

솔직한 입담으로 유명한 강원국 작가도 블로그에 쌓아 놓은 1000개가 넘는 글 덕분에 <강원국의 글쓰기>라는 책을 쓸 수 있었다.



기록해놓지 않는다면 사라지고

기록해 놓으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그날 영화관 이후 포스트잇과 인덱스, 볼펜 두 자루를 챙기는 습관이 생겼다.

매분 매초를 자로 재단한 듯 철저하게 살 수는 없겠지만 떠오르는 단상들을 글 속에 묶어놓는다면

시간을 붙잡을 수는 있다.

오늘 나의 메모가 미래의 어느 순간은 빛이 되는 날이 있다.

글이란 건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늘 머릿속 한쪽 칸은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야 쓸 수 있다.

쓰는 사람은 그래서 다른 의미로 부지런해야 한다.



일을 하면서도 소시지를 구우면서도 머릿속은 늘 바쁘다.

지극히 게으르지만 어느 순간은 유난히 부지런한 내가 글을 쓰는 방법이다.



아.

메모하고 싶었던 대사 하나가 생각났다.


"살인자들은 다 누군가의 친구였습니다." - 에르퀼 포와로, 영화 <베니스의 유령 살인 사건> -
이전 05화물처럼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