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작가라고 하면
일필휘지 하며 쭉 글을 쓰고
밤을 새워 작품을 완성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지금 와서 보니 무라카리 하루키처럼 오전 일정 시간 글을 쓰고
체력 관리를 위해 수영과 달리기를 하거나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처럼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글을 쓰는 작가.
혹은 직장인처럼 작업실로 출근하여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글을 쓰는 작가도 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천재처럼 쓴다, 이런 경우는 뭐 말 그대로 드라마였다.
현존하는 작가들이 원래부터 천재인지
일말의 가능성만으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작가가 된 건지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계속 쓰는 사람이 작가다.', '끝까지 써라'라고 말하는 거 보면
계속 쓰다 보면 엑스칼리버는 못 뽑아도 정말 무라도 썰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난 일정 장소에서 늘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아직은 자투리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쓰는 사람이다.
일을 마치고 가족들 저녁 식사를 준비해주고 나면 합법적인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데 이마저도 무척 몰입을 해야 한다.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하루 종일 종종거리면서 본업이나 잘하세요 하는 말도 들은 데다가
너무 생업과 이상을 구분 못하나 싶어서 살짝 눈치를 보면서 글을 쓴다고나 할까.
이번 명절엔 설거지옥을 경험하며 음식 준비를 다 마친 후엔
어머님과 막걸리 한 잔 노나 먹고 각자 휴식 시간에 돌입했다.
각종 프로그램이 펼쳐지는 티브이 앞에 조그만 밥상 하나 펼쳐두고
노트북을 켰다. 블로그 한 편, 브런치 글 한 편.
추석 특선 영화 속 멋진 배우가 아무리 유혹해도 일단은 쓰고 본다.
조앤 K. 롤링처럼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있을 수 있는 나만의 단골 카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 또한 녹록지 않다.
아는 누군가는 새로 생긴 스타벅스 2층에선 바깥의 호수를 바라보며 글을 쓸 때 잘 써진다고 하던데
도대체 나만의 장소는 어디일까.
아무도 없는 집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글을 쓸 때는 그나마 괜찮은 것 같은데
글을 쓰고 나서 어울리는 사진을 고르느라 또 그림 삼매경이다.
그래서 규칙을 정한 것이 일단 눈에 한 번에 어떤 사진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한다.
안되면 빠르게 찾는다, 뭐 이렇게 정해놨는데 가끔은 그런 규칙도 무용지물이다.
나만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새벽 시간을 노려보지만
완벽하게 같은 시간에 일어나 글을 쓰는 게 쉽진 않다.
조금 늦어서 6시에 일어나면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가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만 한다.
새벽 시간을 위해 일찍 자야 하건만 저녁 식사 후 보내는 시간이 또 훌쩍 가버리니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하루하루다.
양배추를 썰고 두부를 으깨면서도 얼른 준비하고 노트북 앞에 앉아야겠다.
얼른 자료만 만들어놓고 글을 써야겠다 생각하며 머릿속은 늘 바쁘다.
생각해 보면 나만의 리츄얼은 딱히 없는 것 같고
그냥 시간 되는대로 쓰자가 요즘의 일상이다.
하루에 블로그 한 개, 브런치 스토리 한 편.
딱 이렇게만 진행되고 있는 게 나의 요즘 글쓰기 리츄얼이다.
뭐 대단히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하루라도 빠트리면 벌써 몸이 어색하고
손가락이 굼뜬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글감도 마이너스다.
이때마다 깨닫는 건 아직 내 몸에 글쓰기 근육이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만 자각할 뿐이다.
일단 쓰자.
글씨를 조합해 보자.
하루 종일 글쓰기 출근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늦게든 일찍이든 글을 쓸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겠다.
지금도 이미 시간이 30분이 지나버려서 새로운 날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썼으니 오늘은 그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딱히 집중력 있는 시간을 정하지 않아야겠다.
언제든 그냥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