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 엄청난 드라마 덕후였다.
수목드라마, 월화드라마, 주말드라마 등등 모든 드라마는 다 보았고
심지어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일요 아침드라마까지 다 보았다.
드라마 ost까지 닳고 닳도록 들었으니 할 말 다했다 정말.
모든 인생의 서사가 드라마 위주로 돌아갔으니
참 어렸던 때였다.
입덧을 할 때에는 그렇게 일일드라마를 봤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주인공이 괴롭힘 당하고 오해받는 게 전부인 내용인데
줄기차게 매일 30분씩 봤었다.
그 30분을 다른데 썼으면 인생이 조금 바뀌었으려나.
아이를 재우고 새벽에 몰아보는 드라마의 맛은 엄청났고
그 서사에 몰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게 시시해졌다.
픽션의 세상을 느끼기엔 사람이 너무나 건조해져 버렸다.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나 바쁘기도 했고
정신없었고, 또 바빴고.
어린아이들을 키우면서 제대로 드라마 한 편 음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책도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자꾸 그 이야기들이 와닿지가 않았다.
어차피 없는 세상 속에 내가 왜 있어야지 하는 생각.
그 시간에 어서 잠이 들고 싶다는 생각.
돌이켜보면 무뎌진 감정만 붙잡고 살았던 것 같다.
아이들 책 읽어주기도 바빴고
살림하기도 벅차고
일도 해야 하는 생활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내기란 핑계 같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책 한 권을 만나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책을 고를 때 표지 디자인이나 글씨체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일단 표지를 보면 느낌이 오는 책들이 있다.
아, 이 책은 읽어야 하는구나.
그 책이 바로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였다.
그래, 생각났다.
학교 독서모임에서 다른 엄마들과 읽게 된 책이구나.
나라면 선뜻 고르지 않았을 소설책이었다.
모르는 작가.
모르는 내용.
하지만 처음부터 술술 읽히기 시작했다.
자극적이지도 않고, 편안하면서도 책방 주인인 '영주'의 서사가 작위적이지 않고 개연성이 느껴졌다.
그 후로 소설을 이제 읽어도 되겠구나 싶었다.
학창 시절에 읽었던 우리나라 소설은 왠지 시공을 넘나드는 이야기 아니면
페미니즘 느낌이 강했었는데, 지금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고나 할까.
<책들의 부엌>도 마찬가지였다.
옴니버스식 구성은 '휴남동 서점'과 비슷했는데, 표지가 끌렸고 요즘 사람들이 바라는 서정성이 느껴졌다.
마치 비 온 뒤 맑게 갠 가을 하늘처럼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 이야기들.
이래서 소설을 읽는구나.
잘 읽히는 책은 독자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구나.
머릿속에 인물들의 동선이 그려졌다.
그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또 동경하게 되었다.
나도 저렇게 살 수 있겠지?
내려놓고, 살아내고,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담고 싶은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며 꼭꼭 씹어먹어야겠다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생각의 전환을 이루는 책 한 권쯤은 있다고 여겨진다.
꼭 책이 아니라 영화일 수도 사람일 수도, 혹은 장소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삶의 작은 전환점이 된다면 엄청난 변화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니 기다려보자.
억지로 만드는 거 말고 나의 작은 행동에서 하나하나 다가오는 것을.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라고
외향적이지 않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마음속에서 갈망하고 있다면
어느 시점에,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지 모르니.
내게 소설책이 다시 다가온 그 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