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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돌봄 Feb 02. 2024

진실, 혹은 거짓말.

우연히 어느 날 밤, 남편과 아이들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과 나에겐 암묵적인 룰이 있는데, 부모 한쪽이 아이들에게 훈계하거나 어떤 말을 할 때 설사 의견이 다를지라도 그 자리에선 침묵하고 부부가 아이들 없는 곳에서 따로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그날따라 둘째에게 말을 하는 남편의 행동이 뭐가 마음에 어긋난 건지

아이 앞에서 빨리 방에서 나오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의외로(?) 남편은 수긍을 잘한다.

본인의 생각이 강하지만 상대방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보지 못한 부분이라 판단이 되면 인정을 바로 하는 편이다. 아이 앞에서 왜 그렇게 말했냐며 대화를 시작했지만 결국엔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부모가 생각하는 대로 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아이들의 장래에 대해 플랜을 가지고 있는지가 그날 대화의 마지막 골자였다. 남편은 최악의 상황을 일단 생각하며 대비하는 편이고, 나는 가장 긍정의 상황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극과 극이 만나는 것처럼 우리 둘은 다르다. 그 점을 서로 동경하고 때론 몹시도 답답해한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면 되는 것인가.

재능이 보이는 일을 계속 밀고 나가면 되나. 

혹시라도 최악의 상황에서 밥 먹고 살게 하려면 어떡해야 하나.

부모는 자식이 자신보다는 잘 살기를 바란다.

어쩌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잘 해낼 것이다.

어느 순간엔가는 부모님이 이랬었다면, 이런 사람이었다면, 저런 위치였다면 하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때가 어떤 모먼트일지는 모른다.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다 보니 싫어지고 의무감이 짙어질 수도 있다.

역시나 관심 있는 분야의 일을 했더니 돈도 벌고 좋더라도 될 수 있다.

내가 했던 고민을 아이들도 어느 순간 할 것이며, 그들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모르겠다.

단지 부모로서의 애정, 먼저 산 어른으로써의 책임감,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오버랩되며 찾아오는 아련함이 함께 하는 오묘한 감정이 든다. 


혹자는 나를 먹여 살리는 것만큼 숭고한 일은 없다고 했다.

나 이런 일 할 사람 아닌데.

이거 내가 원하던 거 아니었는데.

이런 말은 어설픈 자기 회피일 뿐.

그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을 스스로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위대하고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그러니 제발 열심히 하면 된다고. 그게 진짜 어른이라고.


스무 살 언저리, 마흔이 넘으면 마냥 편안해질 것 같았는데.

이건 웬걸, 십 대 저리 가라다.

십 대나 이십 대에는 젊음이라는 두근거림이 미래를 향한 두려움을 잊게 했지만 사십 대의 두근거림은 그와 결이 다르다. 종국엔 나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능력의 하니까를 매번 체감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단지 마음을 편안히 먹는 것일 뿐.

좋은 글귀를 읽고, 긍정의 마음을 갖는 것.

불안감을 짜증이나 질책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마음을 다시 들여다봐야 할 시점이다. 


감정은 고스란히 사람의 마음에 얼룩을 남긴다.

생채기를 낼 수도 있고, 짙은 여운이 될 수도 있다. 

다시 한번 말의 힘을 되새겨야 할 때이다. 






전문가란, 모든 실패를 경험한 자.

<흔들리는 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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