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광이였던 십 대 시절엔 학원 공부를 마치고 숙제까지 다 끝내놔야 마음이 편했던 소녀였다.
할 일을 다 해놓고 10시 드라마를 볼 때 그 행복감이란.
이불속에 폭 들어가서 드라마를 보다가 잠들곤 했는데, '파일럿'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어찌나 승무원들이 이뻐 보인 던 지.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 드라마였던지라 조종사, 승무원, 항공운항관리사 등등 다양한 직업을 엿볼 수 있었는데 소녀의 마음은 역시나 승무원 배우들이었다.
그래, 이뻐야 승무원도 하지.
지금이야 여러 항공사에서 실용적인 유니폼 디자인이 많이 나왔지만 당시엔 더 승무원은 6센티미터 이상 킬힐에 치마를 입었더랬다. 외항사에선 할머니 승무원도 계신데 유독 우리나라는 승무원 하면 미모가 강조되었던 것 같다. 물론 외국어 실력도 필수인 직업. 그리고 무엇보다 고급진 환경에 나를 설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돋보였다. 바르고 곧은 자세.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와 친절함.
드라마 '요조숙녀'
간간히 승무원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보며 늘 선망하고 감탄해마지 않던 십 대 소녀는 대학생이 되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준비해 보자."
그때는 지금보다 더 심한 도전의 아이콘이었던지라 승무원 시험 준비에 매진해 보기로 했다.
누가 봐도 한 미모 하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깡마른 몸매(지금은 없는), 도전 정신 하나 믿고 해 본 것이다.
지랄 총량의 법칙!
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송곳처럼
튀어나올지니 도전하라 자매여.
일단 등록한다, 학원.
대형백화점 근처 승무원 전문 학원에 등록부터 했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무용과 학생들이었고 간혹 경영학이나 간호학을 전공한 여인네들도 있었다.
하얀 카라의 블라우스와 검은색 치마, 둥근 코 구두를 기본 아이템으로 장착하고 미소 연습부터 시작이다.
스마일 하고 미소 지을 때마다 입가에 경련이 부르르 일고 이것이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 되면 연습이 끝난다. 전직 승무원이었던 선생님들의 가르침에 발맞추어 다시 '스~마~일'하고 웃어본다.
2교시 시작.
이젠 캐빈 잉글리시 연습 돌입이다. 실제 비행 상황에서 쓰이는 용어와 문장들을 연습하고 파트너들과 암기 테스트를 한다. 영어는 좋아하니 이 시간은 얼추 무사통과다. 나머지 영어 공부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토익 점수 올리기에 힘써야 한다.
3교시는 메이크업 수업.
메이크업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전문가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페이스 메이크업의 기초부터 수업을 시작하신다. 처음 화장을 제대로 해보는 거라 한동안 내 얼굴형에 맞는 눈썹 그리는 법, 볼터치하는 법, 튀어나온 광대뼈나 턱선을 정리하는 법 등을 배우며 집에서도 신나서 화장을 하고 다녔더랬다. 한동안은 기초 제품 바르기, 파운데이션(비비 크림이란 것이 없던 시절) 바르기, 팩트 바르기의 단계를 순서대로 거치고 나면 나만의 가부키 화장 완성이다.
요즘처럼 다양한 항공사도 없던 시절, 목표는 대한 항공과 아시아나 항공 캐빈 크루가 되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 당시 떠오르던 아랍 에미레이트 항공(외항사)에서 모집 공고가 났고, 면접은 서울이었다.
검은색 치마와 하얀 블라우스를 챙기고 둥근 코 신발까지 준비완료였다.
강남에 계신 큰 이모댁에서 하루 자기로 하고 면접을 준비했다.
23살 사촌 누나가 마냥 어색했을 10살 사촌 동생은 금세 적응했는지 많이 먹으라며 고기 한 점을 내 밥그릇에 놓아둔다.
면접장으로 향하는 아침 강남의 거리는 뭔가 화려하고 바빠 보인다.
대형 의류 매장 외부 광고엔 내 또래 여자 연예인이 예쁜 옷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다.
그래, 면접장을 나올 땐 나도 저렇게 환하게 웃으리라.
하지만 막상 면접에선 면접관이 원하는 답을 하지 못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고 나왔다. 아랍문화권에 대한 무이해와 준비 부족, 아빠 모르게 면접장에 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긴장을 했던 건지 의욕이 저하된 건지 마냥 준비 과정에만 몰입하고 실전은 많이 해보지도 못한 채 나의 1년여의 승무원 준비는 끝이 났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왜 계속 도전하지 않았는지, 끈기가 없어서 도대체 어떤 일을 해내겠냐는 둥 잔소리를 좀 해주고 싶다. 혹은 잘할 수 있다며 하다 못해 면접의 달인이라도 될 수 있지 않냐며 격려도 해주고 싶다.
습관은 무섭기에 지구력 없었던 과거의 내가 안타깝다.
계속하는 힘을 갖지 못한 채 나이만 들어버릴까 봐.
'물'과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나를.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액체.
그래서 환경이 나란 사람을 만들어갈 거라 생각해 시도했었다, 이 일을.
계속하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그 나이가 절대로 늦은 나이가 아니었음을
그때의 난 왜 몰랐을까.
한동안 비행소녀의 꿈을 잊고 살즈음 신혼여행 비행기에서 승무원을 보게 되었다.
흉내 낼 수 없는 미소. 흡사 반가사유상의 스마일이랄까.
그래, 이런 모습이었지.
제복을 입고 캐리어를 끌며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움의 눈빛이 잠시 머물렀다.
드라마 '공항가는 길'
하지만 준비 과정을 통해 만난 새로운 인연들.
학원 선생님들의 곧고 우아한 모습.
거기서 배웠던 여러 가지 기억들.
메이크업은 기똥차게 배웠으니.
나의 삶의 작은 자양분이 되어 녹아있을 거라 믿는다. 그때의 경험 덕분인지 하고 싶은 건 해보자.
혹은 끝까지 해보자라는 마인드.
성실함과 꾸준함이 그 무엇보다 힘이 강함을 정확히 배웠으니 이 또한 의미 있는 경험이 아닌가.
자신 있게 후배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평범하지만 거창한 비밀.
"얘들아, 네가 오늘 성실히 꾸준히 네 할 일을 한 게 정말 진짜로 대단한 거야. 그걸로도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