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 쓸수록 몸에 좋다.
밀레니엄이다 Y2K다 하며 세상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고 여기던 과도기의 2000년, 그때는 막 대학생이 되었던 때이다. IMF 영향으로 모두가 힘들었지만 00학번 새내기에게는 그저 새로운 시작으로 설레던 겨울이었다. 극단적인 수능 네 영역의 점수차로 교대 입시는 진작에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딱히 재수를 생각할 정도로 다시 공부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대학 입학까지 3개월여를 남겨놓았던 그 시간에 원 없이 책과 만화책을 보고 뒹굴거리며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친구들은 운전면허를 따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나는 밸런타인 데이 초콜릿 판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사실 마냥 놀 수만은 없었던 일말의 마지막 양심이랄까. 그 해 겨울은 유달리도 추웠는데 하필이면 초콜릿 가판대는 동네 대형 마트 입구에 있었다. 당시엔 그런 대형 마트도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동네 주민들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이 장을 보러 오곤 했다. 이건 마치 (조금 과장해서) 1988년 첫 ‘맥도널드’ 매장이 지금이나 그때나 트렌디한 동네인 압구정동에 처음 1호점을 오픈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두꺼운 코트에 두툼한 장갑까지 챙겨서 나와 생애 처음 판매라는 것을 시작했다. 초콜릿 모양은 정말 다양하기도 했는데 콩알만큼 작은 것에서 화려한 포장에 겹겹이 쌓인 것까지 세상의 초콜릿이란 초콜릿은 다 모아놓은 모양새였다.
“초콜릿 보고 가세요. 밸런타인 데이 기념 특별한 초콜릿이에요”
되지도 않는 멘트를 들어가는지 나가는지도 모르는 손님들에게 외치던 그때 함께 일하던 매니저 언니가 이런 나를 보며 한 마디 던졌다.
“어머 얘, 저기 좀 봐. 이런 손님한테 붙어야 하는 거야. 나 하는 거 잘 봐.”
매니저 언니는 당시 유치원생 두 아이들을 키우던 엄마인데 눈매도 어찌나 예리하던지 얼굴엔 야무짐이 넘쳐흘렀다. 이제 새내기 스무 살에겐 더 그렇게 보였겠지만. 따뜻해 보이는 밍크 모자를 쓴 노부인에게 착 붙어서 초콜릿을 판매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대단해 보였다.
“초콜릿이라고 그냥 초콜릿이 아니다. 아무한테나 말하지 말고 저런 사람한테 붙어. 봐봐. 옷부터 다르지? 팔에 찬 금팔찌랑 반지는 봤어? 저 가방도 그냥 가방 아니야. 사람이 뭘 입었는지 뭘 들었는지 볼 줄 알아야 팔지. 많이 살 만한 사람한테 붙어. 아무한테나 말하지 말고.”
나름의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언니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부를 잘 못해서 추운 날 이렇게 고생하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다가 이깟 초콜릿 판매가 뭐라고 저렇게 있어 보이는 사람한테 착 붙어서 파는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다양한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밸런타인데이 전 8일 동안 일하는 조건이었는데 매일 저녁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은 내가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언니는 경험에서 우러난 특급 영업 비법을 전수해준 것이다. 본인 일에서 정말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준 것일 수도 있다. 좀 덜 힘들고 성과는 나오게끔 어린 아르바이트생을 이끌어 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위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탁 붙어서 초콜릿을 파는 모습이 어린 나에겐 좀 낯설고 씁쓸하기도 했다. 또 매니저 언니를 따라 물건을 가지러 간 초콜릿 도매점 사무실에선 달콤한 냄새와는 별개로 조금은 지쳐있는 사장님의 모습이 당시엔 너무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더 어른이 되면 나도 저런 모습이 될까? 조금은 지쳐 보이지만 해야만 하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며 하루를 살아가게 되는 걸까? 저분들한테 이 초콜릿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만난 기억에 남는 초콜릿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와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영화 ‘Chocolate'’ 속에서였다. 어떤 초콜릿을 고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과연 어떤 맛일지 기대하며 고르고 설사 맛이 입에 맞지 않았어도 다른 맛을 골라서 먹어보면 되니 크게 부담도 없다. 한편으론 또 다른 초콜릿은 어떤 맛일까 기대까지 된다. 당시 스무 살의 나는 앞으로가 설레고 기대되어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했다. 내가 선택하는 방향에 따라 달라질 미래가 설레기도 하고 나만은 일상에 지치지 않고 내 꿈을 이룰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도 있었다. 나에게 초콜릿은 영화 ‘Chocolate’ 속의 초콜릿처럼 감정을 데워주는 것이었다. 지금 판매하는 초콜릿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고 다시는 추운 곳에서 이렇게 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난 이런 일 안 할 거야’라는 어설픈 자존심 혹은 철없는 자신감. 그들도 인생을 안간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40줄에 접어든 지금에야 그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나면서 나의 마음이 투영된다. 그때보다 뭐가 더 나은가. 내가 과연 꿈을 이루었는가? 나도 지금 필사적으로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내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스무 살 청춘들이 날 볼 때도 그때의 나와 같을까? 매니저 언니와 사장님의 표정처럼 나도 세월의 흔적을 지금은 담고 있는데. 달콤함이 가득했던 이십 대가 아닌 씁쓸함이 있는 40대의 나는 질문이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의 초콜릿 상자를 열어 본다. 아직 남아있는 초콜릿이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