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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아씨들

by 마음돌봄

자매 이야기는 수많은 여자 아이들에겐 로망이자 다수의 드라마, 연극, 영화로도 재탄생할 만큼의 매력적인 소재이다.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은 동명의 제목으로도 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과연 그 안에 어떤 이점들이 있길래 그러했을까?


아들 엄마인 난 평생 내 아이들을 '작은 아씨들'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작가 루이자 메이 올콧의 아버지가 소녀들에게 '작은아씨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에 여성들이 대학 교육을 받기도 어렵고, 집안의 좋은 아내 역할만 강조되었을 시기인데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이런 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은 루이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남성의 힘에 기대고 싶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어 자립하고 싶었던 그녀는 가정교사로 일하거나 신문에 글을 쓰며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었다. 어렸을 때 이 이야기는 나의 롤모델을 찾는 이야기였다. 거의 대부분 으 여자 아이들이 개성 강하고 글을 잘 쓰는 '조'에게 처음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을까? 바로 '조'는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이었을 테니. '조'도 글을 쓰는 능력으로 돈을 벌었고, 사랑에 있어서 인생에 있어서 주체적으로 생각한 아이였다. 작품의 배경의 미국의 남북 전쟁 시기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집안일을 해냈는데 마치 씨네 집의 네 딸들도 다르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면 자애로운 아버지, 지혜로운 어머니, 그리고 네 자매 간의 끈끈한 우정과 사랑이 그것일 것이다.


단순히 '조'를 보며 작가를 꿈꾸던 시간을 지나 엄마가 된 지금은 사뭇 이 작품을 읽는 관점이 달라졌다. 메그, 조, 베스, 에이미. 각자의 인생은 같은 분량으로 다가오며 그 뒤엔 마치 부부가 있다는 것이 더 명백해졌다. 부모란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교육을 받고 자라왔지만 딱 하나. 교육받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이것은 바로 '부모 교육'이다. 기독교적 신앙 속에서 아버지 학교가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범국가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교과목에 '부모의 역할'이나 '아빠란 무엇인가', '어머니의 길' 같은 과목은 없다. 교과는 때에 따라 개정되고 입시 제도는 변하지만 부모에 대한 교육은 애초에 시도된 적이 없다. 우리는 그저 내 본가에서 보고 배운 것이나 책이나 영상을 통한 타인의 삶을 보고 알 수밖에 없다. 그 점이 교육열의 뜨거운 열기를 더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해답까진 아니더라도 현명한 예시를 고전 작품 속에서 찾으려 한다.









“우리 딸들 모두에게 나의 사랑과 키스를 보내오. 낮에는 그 애들을 생각하고 밤에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언제나 그 아이들의 애정 속에서 위로를 받고 있다고 전해 주시오. 아이들을 다시 만날 때까지 남아 있는 1년이란 시간이 내게는 너무 길지만, 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각자 할 일들을 열심히 해서 이 어려운 시간들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해 주시오. 난 우리 딸들이 내가 한 말을 모두 잘 기억하리라는 걸 믿고 있소. 엄마에게는 사랑스러운 딸들이 되고, 자기 책임을 충실하게 행하고, 마음속의 적과 용감하게 맞서고, 내면을 멋지게 가꾸어서 내가 그 애들을 다시 만날 때는 우리 딸들에 대해 이전보다 더 큰 애정과 자부심을 갖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전해 주시오.”
- 전쟁에 참여 중인 마치 씨의 편지 -

전쟁은 당장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협주곡이다. 그곳에서 도착한 아버지의 편지는 다정하기 이를 데 없다. 비관적이고 비참한 죽음의 그림자보다는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상황을 말하는 아버지의 편지는 애틋하면서 든든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만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본인이 할 일을 성실히 할 것을 말하는 아버지, 귀향 중에서도 수천 통의 편지를 보낸 다산 정약용 선생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과연 나도 극한의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줄 수 있나 생각해 보면 재산도 부도 아닌 '인생에 대한 태도'라고 말하고 싶다.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안정된 상황에서 여유와 인심은 언제든 부릴 수 있다. 한없이 인자해질 수도 있다. 사람의 인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가정이 힘들었을 때, 세상이 무너질만한 상황일 때이다.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자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달라질 수 있다. 긍정심을 유지하고 현재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보여준다면 단단한 육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부인은 경험만큼 뛰어난 선생님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딸들이 스스로 교훈을 배우도록 놔두는 편이었지만, 딸들이 소금과 차풀처럼 엄마의 충고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때에는 기쁜 마음으로 나서서 일이 더 쉽게 풀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작은 아씨들>-

자녀가 힘든 순간을 겪는 것을 감당하기가 힘든 것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신이 모든 순간에 함께 할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자녀가 힘든 모습을 보기 힘겨워하고 어느 선까지 도움을 줘야 할지 그 경기에서 고민하기도 한다. 너무 손을 넣어도 아이의 자립심이 약해질 것이며, 너무 방관해도 적절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놓쳐 괴롭다. 이럴 때 한 가지 기준을 세워보자면 마치 부인의 말처럼 경험을 하게 두는 것도 좋다는 것이다. 물론 부모가 모든 순간을 알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크게 바운더리를 만들어놓고 아이가 스스로 깨닫게 두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에이미가 직접 따돌리는 아가씨들 사이에서 본인의 역할을 다해 자신을 지킨 것처럼 그리고 집안일이나 맡은 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지내보게 해서 작은 아씨들이 일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 것처럼. 그 잠깐의 시간을 참고 지켜보는 것도 부모의 일이리라.







“(…) 젊은 부부는 멀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래서 더욱더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단다. 처음 느낀 애정은 서로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점점 희미해지거든. 그리고 부모에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그 첫 시간들만큼 아름답고 소중한 때는 없단다. 아이들에게 존이 낯선 사람이 되도록 만들지 마렴. 고난과 유혹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존만큼 네 아이들을 안전하게 행복하게 지켜 주는 사람은 없단다. 그리고 너희 부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될 거야. (…)” -<작은 아씨들>-

요즘 젊은 아빠들은 아이 교육이나 집안일에도 동등하게 많이 참여한다지만 자녀 교육의 영역에 있어서 한국의 엄마가 막중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치 엄마의 성적표 같은 아이의 상급학교 진학이나 입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엄마는 많이 없다. 경력 단절과 경력 이음의 사이에서 혹은 계속되는 직장 일과 육아의 사이에서, 혹은 제2의 자아를 찾게 되는 마흔의 어느 시점에서도 우리는 아이의 교육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초기 양육 시기를 돌아보자. 책육아, 자연 육아, 놀이 육아 등 나름의 교육 방침을 세운 부모(특히 엄마)는 아이의 탄생 이후 오롯이 자녀의 교육에 올일한다. 자칫 아빠를 등한시하게 되거나 아빠의 역할을 주지 않고, 혼자서 독박 육아라고 힘들어하면서도 교육도 포기할 수 없다. 물론 실제로 가정마다의 사정으로 엄마나 아빠 양쪽이 혼자 육아를 할 수도 있으나 각자의 역할을 주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한다. 특히 엄마들은 아빠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딸의 머리를 이상하게 묶어도, 옷코디가 엄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이 필요하며, 아빠의 사랑을 느낄 시간이 아이에게 필요하다. 결국 부부만이 내 아이를 서로 지켜주는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존중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 서로 부모로서 영역을 지켜주는 모습이 내 아이를 균형 있게 성장하게 할 것이다.



부모의 역할, 부부의 역할을 살펴보았다면 이젠 조부모의 역할도 바라보자.

과연 머지않은 시간이 흐른 후,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까?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고 싶고 끝없는 사랑을 주고 싶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어른도 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녀의 양육방식을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 웃어른이 되고 싶다.

아이의 찬란한 천재성을 지켜주고 싶은 할머니이고 싶다.


“아이가 어려운 질문을 할 만큼 충분한 나이가 된다면, 진실한 대답도 들을 수 받아들일 수 있을 거요. 난 아이 머릿속에 무작정 생각을 집어넣기보다는, 이미 있는 생각 주머니를 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오. 이 아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현명하고, 난 우리 손자가 내가 했던 모든 말을 이해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오. 자, 데미야. 이제 네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주겠니?” -<작은 아씨들>

전쟁에서 무사 귀환한 마치 씨는 여전히 든든한 아버지이자 다정한 할아버지다.

마치 씨처럼 어른의 생각을 강요하는 할머니가 아니라 오히려 여유 있게 대화 나누고, 고유성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꼬마 철학자와 나눌 이야기가 벌써 기대가 된다.








자식 교육에 정답은 없고, 죽을 때까지 끝도 없다.

어떤 순간에 한없이 사랑스럽고, 어느 날엔 영원처럼 힘이 든다.

그럼에도 인생을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위대한 일은 아이의 엄마가 되고 부모가 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여 최선을 다할 뿐이다.

세상이 하염없이 이어지는 꽃밭도 아니고, 가시밭길만 펼쳐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자녀 교육에도 굴곡은 있다.

그저 부모 스스로를 다잡고 살 수 밖에는 없다.

웃는 얼굴을 보여 주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방법 말고는 없다.

간혹 힘든 일에도 이겨 내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저 부모는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부모의 그림자를 따르며 보고 배우는 내 아이가 있으므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작은 아씨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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