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작가님의 글을 읽다가 불현듯 이모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마침 오늘은 두 조카 녀석들과 수업을 한 날이었다.
영어라는 벽 앞에서 아이들은 나름의 역사와 고충을 겪은 뒤였다.
어릴 때부터 학군지의 영어 학원을 다니고 원어민 수업을 했던 아이들이 나에게 온 이유는 뭘까?
각자의 사정은 있으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자 한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건 아이들도 나름 힘들다는 사실.
어려움을 숨기기 위해 회피를 선택하여 수업이 재미없었다고 말하거나
가끔은 거짓말을 하고 학원에 간 것처럼 엄마에게 말하기도 하는 아이들.
아이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마음속의 고민과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상의 세계에 푹 빠지는 아이일 수도 있고, 선생님이나 친구들과의 유대 관계가 깊지 않아 외로울 수도 있다.
잘하는 아이들 틈에서 주눅이 들어서 일 수도 있다.
나는 해도 안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자기 효능감이 결여된 경우일 수도 있으며 그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이 자진모리장단처럼 휘몰아쳤을 수도 있다. 한 번씩 학생들에게 혹은 조카들에게 어떤 선생님 혹은 어떤 어른으로 기억될까 생각해 보면 화끈거리는 순간도 여러 번 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우리 이모들도 그랬을까.
아모르파티를 부른 김연자 가수를 닮은 큰 이모.
위트와 유머를 겸비한 큰 이모는 글을 아주 잘 쓰는 분이었다.
이모의 글을 직접 읽은 적은 없지만 함께 대화를 해보면 즐겁고 유쾌했다.
친정 엄마는 큰 이모가 소녀 같은 외할머니 대신 엄마 노릇을 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며 글을 계속 쓰지 못한 상황에 늘 안타까워하셨다. 이 년 전 외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만난 큰 이모는 여전히 유머와 재치 있는 말솜씨로 이젠 나이 들어버린 조카에게 어릴 적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와주셨다. 이모를 모시고 온 사촌 오빠와 올케 언니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는데 목소리만은 기억속의 그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다.
둘째 이모는 아직도 가까이 살고 있어 그나마 자주 만날 수 있다.
성악을 전공한 이모는 여리디 여린 몸에 놀라운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압도적인 성량에 놀라곤 하는데, 지금은 교회에서 찬양을 하거나 외할머니를 돌보며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 말은 많이 없으셨지만 어릴 적 외가댁에 갈 때면 그때에 자주 접하지 못한 음식인 피자를 커다란 전기 프라이팬에 뚝딱 만들어주곤 하셨는데 유럽 여행 중에 먹어본 스타일이라며 소개해줬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담백해서 기름지지 않고 적당히 고소했던 피자는 어린 꼬마였던 나에게 이국적인 정취를 알려주었고, 성악을 전공하고 외국에서 공부를 한 둘째 이모가 마냥 이쁘게만 보였다. 지역 은행에 특채로 취직을 해서 은행원으로 일했던(당시엔 성악과를 나오도 특채가 됐나 보다) 이모는 결혼을 늦게 한 편이었는데 우리 엄마는 동생인데 왜 결혼을 빨리했나 이모를 보며 반문하기도 했다. 여하튼 담백한 피자와 스파게티를 알려준 이모는 다른 요리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이쁜 피자 이모로 통한다.
막내 이모는 사실 넷째 딸이다. 그 말이 즉슨 우리 엄마가 셋째라는 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최진사 셋째 딸처럼 딱 그 셋째 딸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모'이니 다시 막내 이모 이야기로 돌아오려고 한다. 중학교 선생님이셨던 막내 이모는 직업 덕분인지 아이들의 마음을 참 잘 읽어주는 분이었다. 외갓집에 갈 때마다 작은 방에 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거인의 정원>을 열심히 읽던 나를 기특하게 봐준 것도 이모였고(이제 보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우리 엄마가 알려준 책, 아고 멋진 우리 어무이), 학교에 숙직하는 날이면(당시엔 여자 선생님들은 낮에, 남자 선생님들은 밤에 숙직을 했다. 와이? 아이 돈 노우) 나를 데려가곤 하셨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던 그날도 이모 학교를 따라갔는데 시원한 바람이 창으로 스며들고, 책과 나무 책상이 있는 작은 교무실에서 이모는 이모의 일을, 나는 중간고사 예상문제를 연습장에 만들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 했어야 할 일을 초등학교 5학년(국민학교지만)이 했던 것이다. 공부의 맛을 좀 즐겼다고나 할까(안타까운 내 중등 시절 시험 점수여). 이모가 연주하듯 두드리는 타자기 소리는 일정한 균형을 만들어냈고, 산들바람과 타자기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시 낮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사춘기의 울렁이는 마음이 출렁거리면 귀신같이 내 마음을 안 넷째 이모는 산책을 제안하거나 아이스크림 데이트를 청하기도 했다. 막내 이모도 결혼을 늦은 나이에 하고서는 경기도로 이사를 가면서 자주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명절에 가끔 만나면 따스했던 온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어릴 때 이모들이 세 분이나 있는 게 좋았고, 복작대는 외갓집과 사촌들과의 만남도 좋았다. 지금은 각자 삶을 사느라 자주 모이진 않지만 여전히 엄마를 통해 듣는 소식을 통해 이모들과의 기억을 곱씹을 수 있다. 아직 난 이모가 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이모'라고 불릴 날도 오지 않을까. 조카와 난 어떤 사이가 될까? 미래의 조카에게 어떤 기억을 주는 이모가 될까? 다른 건 몰라도 주야장천 책을 사주는 이모가 될 거라는 건 확실하다. 그 조그마한 아이를 빨리 만나고 싶다. 머리와 위장을 든든히 채워주는 이모가 되는걸 또 하나의 인생의 느낌표로 삼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