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웰컴 투 영화타운

by 마음돌봄

"봐봐, 분명히 이번 신작 빌리는데 내 신상 구두를 걸겠다."


선영 언니는 관찰자다. 그것도 꽤나 매서운.

역시나 이틀에 한 번 꼴로 오는 25세의 남자 손님은 신작 에로 비디오를 빌린다.


"언니, 어떻게 알았어? 저분 나름 옛날 버전 좋아하잖아."

"지은아, 생각해 봐라. 이 언니가 왜 신상 구두를 사겠니? 인간은 새것이 좋은 것이여."


언니와 영화타운에서 함께 일한 지 벌써 6개월째다.

나보다 키는 작지만 훨씬 야무지고 큰 사람이다. 게다가 유머도 아주 크고도 커다란 사람이다.

언니와 함께 일하면서 느낀 건 이래서 직장은 인간관계가 8할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동아리 선배가 가끔씩 와서 회사 진상 선배들이나 상사들을 얘기할 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렇게 알바라도 하면서 보니 정말 일터는 동료가 가장 중요하다고 느끼는 지은이었다.

영화타운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다.


영화타운은 비디오와 만화책, 약간의 종이책을 대여해 주는 곳이다.

동네에서 1호점과 2호점 두 군데를 운영하는 사장님은 그동안 아르바이트하면서 만난 사장님들과는 약간 달랐다.

지난겨울 면접을 볼 때 사장님은 슈트에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계셨는데 말투가 뭔가 젠틀한 것이 멋진 건 아니지만 남달랐다고나 할까. 여하튼 그동안 지은이 만났던 사장님들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한참 어린 지은에게도 1호점의 혜진에게도 나보다 두 살 많은 선영언니에게도 반말이 아니라 선영 씨, 지은 씨, 혜진 씨 하고 부르곤 했다. 사장님이 대기업 출신이라 하시더나 그래서 그런가. 삼성맨으로 유럽 지사에서도 근무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하고 생각하는 지은이다.


오전 근무, 오후 근무를 다 해 본 지은은 어느 시간대가 되든 재미있었다.

오전엔 좀 한가한 편이라 작은 매장을 쓸고 나면 대여함을 열어 밤새 들어온 책을 꺼내 책장에 정리한다.

마트는 아니지만 바코드를 찍는 것도 재미있고, 취향에 맞는 음악을 틀어놓고 앉아있는 것도 좋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그저 다 좋다. 점심 때는 사모님이 가끔 유부 초밥을 만들어 오셨는데 역시나 밥은 남이 해준 밥이 최고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인 스무 살의 지은에겐 어떤 도시락이든 꿀맛이겠지만. 오전엔 비디오를 빌리러 오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해 본다. 프리랜서인가, 휴학생. 어쩌면 군대를 곧 가야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틀에 한 번씩 만화책을 빌리러 오는 채소트럭 사장님이 등장하는 것도 이 시간이다. 오후 1시. 손님을 응대하면서 중간중간 만화책을 읽는 것 같다. <도시 정벌>이나 <열혈 강호>를 주로 빌리시는데 어찌나 예의가 바른 지 다음 호가 들어오면 그분을 위해 몰래 빼놓고 싶을 때도 있다. 단골손님 중 하나인 25세의 청년은 보통 낮에 온다. 헬스장에서 열심히 만든듯한 펌핑된 근육질의 청년인데 나이까지 소상히 기억하는 이유는 절대 이성적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로지 성인 비디오만 빌리는 그의 취향 때문이다. 손님의 취향인데 굳이, 무슨 자격으로 따질 쏘냐 싶지만 25세라는 나이의 임팩트와 성인 비디오. 스무 살의 지은에겐 알지 못하는 세계이며 전혀 매칭이 되지 않는다.


오후부터 일하는 시간대인 날은 꽤 분주하다.

퇴근하는 손님들. 학원이 끝나고 오는 아이들과 학원 강사분들이 주 고객층인데 신간이 들어온 점심때 미리 타이핑해놓은 오늘의 신간 목록을 보고 다들 책코너로 부리나케 달려가는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저녁 타임은 휘창이라는 친구와 함께 일했는데 이 녀석이 관심 있어 하는 손님이 오는 것도 이 시간이다. 역시 남자들은 뭔가 수수해 보이는 타입을 좋아하는 걸까. 근처 보습 학원 선생님인 그녀는 깔끔한 긴 헤어에 맑은 눈의 소유자다. 딱 봐도 나 착해요, 하지만 단단한 사람이랍니다라고 쓰여 있는 맑은 인상이다. 저녁 10시가 넘으면 근처 고등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학생들이 오는 시간이다. 특히 태양이와 지성이는 영화 타운의 단골손님인데 들어오면서 항상 누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며 허리를 90도로 숙인다. 선영 언니와 지은도 '오, 태양 군. 지성 군 왔어요?'라며 인사를 한다. 이미 신간은 대여되고 없지만 열심히 만화 코너를 뒤적이는 아이들을 보면 역시나 따로 책을 빼놨어야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지은은 실행하지 않는다. 형평성과 알바 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보통 영화타운의 일은 2인 1조다. 한 명이 대여를 해주면 나머지 한 명은 반납된 책과 비디오를 열심히 빠르게 정리해야 한다, 다음 고객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새벽 1시 마감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주로 반납 손님들이 많이 온다. 1시가 지나면 자동 연체가 되는 시스템으로 연체료가 생기기 때문이다. 지은은 생각한다. 자본주의 만만세. 지은도 읽고 싶은 만화책을 고르는 시간도 마감 시간이 다 되어가는 시각이다. 영화 타운에서 일하면서 장점은 누구보다 빠르게 신간 도서를 파악하고 알 수 있다는 것. 나만의 최애 작품이 생긴다는 것. 많은 만화책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요즘 지은은 학교 보다 영화 타운에서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선영 언니랑은 죽이 맞아서 재미있고, 손님들도 어느 정도 파악이 되어 즐겁고 반갑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었던 때는 2002년 월드컵 시즌이었다. 이젠 손에 일이 익어서 혼자서도 대여와 정리가 거뜬했는데 그땐 정말 할 일이 없었다. 부처님 오신 날 즈음 거리엔 색색의 연등이 흩날렸고, 거리엔 정말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가끔 같은 순간에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올 뿐이었다. 아파트 창문의 불빛들이 일정하게 켜져 있었고, 한산한 거리 탓에 지은은 혼자 머나먼 행성에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사람도 동물도 다 사라진 세상, 오로지 지은만 영화 타운에 있었다. 지구에서 하나뿐인 지구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 밤 대한민국은 경기에서 이겼고 동네 치킨집 전화벨은 열나게 울려댔다. 어쩌면 지은의 인생에서 다시없을 단 한 번의 밤이었다.


가끔 지은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고 약간은 웃기기도 했다.

비디오나 책 반납을 잊은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쿨하게 연체료를 내거나(이때 사장님은 연체료를 다 받진 않고 깎아주신다)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하면서 연체료를 탕감받으려고 한다. 원래 이 동네에 안 사는데 친척집에 왔다가 이렇게 비디오를 빌려서 벌써 한 달이 되었고 그 사이 아이가 아파서 경황이 없었으며 등등등.

' 난 그냥 연체를 안 해야겠다.'라고 지은은 생각했다.


영화 타운 일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은 직접 고객의 집으로 비디오와 만화책을 수거하러 가는 것이다.

연체료를 받아야 한다는 부담, 물건을 수거해야 한다는 책임감.


"지은 씨, 연체료는 얘기하지 말고 그냥 비디오 테이프랑 책 받아오세요. 그거면 충분해요."


아, 연체료 얘기 안 해도 되는구나. 역시 사장님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굳이 그 자리에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저 열심히 물품만 잘 챙겨 오면 되니까.

대기업 출신이라 그러신가. 왕똑똑한 사장님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영화타운은 이제 추억 속의 한 장소가 되었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지은이 나이 먹는 속도보다 더 빨랐다.

영화 타운이 있었던 자리엔 이제 다른 곳이 있다.

반찬 가게가 생겼고, MG 새마을금고를 비롯해 신상 카페도 들어서있다.

그 많은 비디오 테이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OTT속으로 다 들어갔을까? 한 알만 먹어도 온갖 영양소가 다 있었던 후레쉬맨 속 영웅들의 식사처럼 그렇게 응축되어 있나 하고 생각하는 지은이다.

원수연의 <풀하우스>도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딸들>도 더 이상 대여할 수 없지만 지은은 괜찮았다.

영화타운은 그녀에게 하나의 마을이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만의 마을이다.

이제는 유튜브 속에서 OTT속에서, 웹툰 속에서 지니의 램프처럼 그 안에 다 들어있는 마을.

지은은 가끔은 그립다, 투박한 네모 테이프가. 빳빳한 질감의 만화책이.

여전히 손끝에 느껴지는 기분이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3화책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