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다.
기후변화에 지구가 흔들려도 다행히 그때는 온다.
학원이 끝나고 국밥이 먹고 싶다는 아들 녀석의 전화에
동네 국밥집으로 향했다.
고기 많이를 외치는 아들 덕분에 모둠국밥을 사서 학원 앞으로 갔다.
집에 가서 국밥 먹을 생각에 행복한 아들과
친정어머니가 챙겨주신 감자를 한 아름 들고 가던 순간
아뿔싸!
올까 말까 밀당하던 비가 와르르 쏟아진다.
우산은 단 하나.
서로의 어깨를 적시며 어느새 키가 나보다 더 커버린 아들과 급히 걸어간다.
국밥을 사수하라는 아들의 말에
뜨끈한 밑바닥을 받쳐 들고 걸어가면서 떠오른 기억은 대학생 때의 어느 여름날.
금요일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그날 따라 혼자 시내 서점으로 가는 길.
장마라는 뉴스를 듣고도 호기롭게 아침에 우산 없이 나온 날이었다.
오후까지 오지 않는 비에
흐리다 말겠지,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하던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후둑후둑 떨어진다.
아, 망했다.
슈퍼까지 가려면 한참인데.
적어도 저 횡단보도 하나는 건너가야 하는데.
지름길인 초등학교 앞 골목길로 들어서니
눈앞에 우산을 쓴 남학생이 보인다.
보나 마나 같은 학교 학생임이 틀림없다.
이 근교에선 대부분 우리 학교 학생이니까.
아싸 가오리를 외치며 우산 속으로 갑자기 뛰어들었다.
저 죄송한데 길 건너 슈퍼마켓까지만 같이 써도 될까요?
살짝 놀랜듯한 또래 남학생의 "예'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얼굴은 쳐다보지 않았다.
봐서 뭐 하게.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를 잠시나마 피하게 해 준다면
그는 이미 나의 연예인.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똘끼인 건지 살겠다는 본능인 건지 묘한 포인트에서 아이디어와 승부욕이 발생한다.
23살 때 친구와 처음 간 와인카페에서는
이벤트로 걸려있는 상품권을 받기 위해 처음 본 남자와 각종 게임을 섭렵해 결국
일등을 하고만 난년이 나다.
영화 클래식 같은 낭만적인 만남이 이어졌을까?
풋.
늘 그렇듯(나에게만 그럴지도) 현실과 영화는 다르다.
나의 영화는 언제나 극사실주의이다.
비를 맞지 않고 살겠다는 일념하에 뛰어든 여학생을 내치지 않고 도와준 그 젊은이는 지금
어느 누구의 남편이 되었겠지.
그리고 지금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그 여름 우산 속에 뛰어들던 한 여학생을 잠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