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돌봄 Jul 14. 2023

1994년, 그 해 여름은

더위만큼 뜨거운 추억

각자의 얼굴형은 고려하지 않은 귀밑 2센티로 잘라버린 머리.

처음입은 어색한 교복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시험 만점 받는 친구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려도 주변 사람들이 신경 쓰이고

버스 안에서 자리가 없어 손잡이만 잡고 서있을 땐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어색하던 여중생.

그 기억보다도 내 뇌리에 스치는 건 해도 해도 너무나 더웠던 그 해 여름이다. 

더위를 가늠하는 폭염지수도 역대 최고였던 그때는 갑자기 바뀌어버린 환경 때문에 더 어지럽기도 했다.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에만 의지하던 하루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열대야일수도 역대 1위, 낮 기온도 평균 31.1도로 역대 1위이던 그때.

집에 돌아오면 선풍기를 껴안아가며 살았었고 얼굴에선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속옷까지 벗어젖히고 더위를 피해 보지만 뱉어지는 숨은 습기 찬 세탁실 같았다. 

교복도 불편한데 엄마는 체형 보정을 해야 한다면 거들을 입히셨고 덕분에 땀띠를 달고 살았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참고 살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사춘기의 소녀는 불편한 줄도 모르고 입고 다녔다.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아름다운 교정이 유명한 곳답게 학교는 푸르고 잔디는 청량했다.

친구들과 점심시간이나 저녁 시간에 교정을 걷노라면 세상 처음이라는 이 더위도 가시는 듯했다.


저녁이면 방문과 현관문까지 활짝 열고 선풍기를 틀어 댔다.

수박을 아자작 씹으며 한 일은 드라마 보기.

'사랑을 그대 품 안에'라는 드라마가 대히트였는데 14살의 소녀의 눈엔 차인표 배우가 왕자님이 따로 없었다.

엄지 손가락을 흔들어대며 미소를 살짝 날려주거나

색소폰을 불어 제치는 모습.

그리고 살짝 미국물은 들었지만 깔끔했던 웃음과 매너까지 이후 나온 온갖 청춘드라마의 교과서가 된 드라마에 푹 빠져들었다. 

어른이 되면 저런 연애를 하리라 불끈 다짐하고 여주인공처럼 밝게 신나게 웃어보리라 결심도 해봤다.

불을 끄고 누운 밤이면 라디오를 틀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디제이의 음성과 노래를 들으며 잠이 들었는데,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과 지금도 현역인 '015B'의 노래에 빠져서 앨범을 사고 라디오에 심취했다.

그뿐이랴, 홍콩 영화의 황금시대.

곽부성과 유덕화, 오천련이 나온 '천장지구' 시리즈를 보며 곽부성 앨범까지 사서 노래를 들었다. 

남주인공의 미모에 감탄하며 보다가 왜 여주인공인 오천련이냐며 불만을 토해냈지만 결국은 여주인공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던 영화, 천장지구.

친구들과 영화 잡지와 만화잡지 윙크를 보며 '이은혜' '원수연' '신일숙'의 작품들을 즐기던 그때가 아마도 진정한 문화의 르네상스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더위 때문인지 중학교에 적응하는 게 힘들어서인지 모를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다는 믿기 힘든 뉴스가 나올 때면 아스팔트에서 익어가던 계란프라이를 보는 것만큼 놀라웠다.


막 중학생이 되어 어린아이와 소녀의 경계에서 어리둥절하던 그때.

조금 더 큰 세상 속에서 고민하던 그때.

듀스의 음악처럼 뜨거웠던 여름.

많은 음률과 이야기들이 다 내 이야기인 것만 같던 14살의 무더운 여름은 그렇게 흘러갔었다.
















하나의 글감, 11가지 이야기.

그 곳엔 당신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Find your story.

사브작 북클럽.

매거진의 이전글 더위에 끼니를 챙긴다는 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