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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우론은 검은옷을, 간달프는 흰옷을 입고 있을까?

by 정찬영

의문스러운 점 중 하나. 빛은 왜 희망을 상징할까? 반지의 제왕에서도 착한 역할인 간달프는 맨날 흰옷을 입고 빛을 쏘아 대고, 악역인 사우론은 항상 어둠 속에 있었더랬지. 아니, 착한 사람도 검은 옷을 입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신기하게도, 상담을 받으러 온 내담자가 '점점 치유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 중 하나가 바로 옷의 색깔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어두운 옷과 표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가, 어떤 국면을 맞이하면 흰옷, 노란 옷, 분홍 옷, 하늘색 옷 등등을 입고 온다는 것이다. 물론 표정도 함께 밝아진 채로. (참고로 미술치료 영역에서 흰색은 '회복하려는 마음'을 상징한다고.)

정말로 빛은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의사 선생님들의 뻔한 말처럼 빛을 쐬기만 해도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하루 종일 수업을 듣는 금요일 오후 3시만 되면 눈과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바쁜데 매주 시험을 치르니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 뇌와 눈알을 쏙 꺼내 깨끗하게 씻겨서 다시 장착하고 다시 수업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은 심리 상담사라는 직업인이 되기 위해 모인 장소였다. 나름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야 할 사람이 뇌를 씻겠다고 수업 중간에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선택한 것은... 그냥 엎드려 자는 것이었다. '15분만 쉽시다'라는 교수님의 말과 동시에 냅다 책상에 엎드리면 그래도 두통은 꽤나 사라졌다.

문제는 목과 허리였다. 안 그래도 맨날 책상에 앉아서 있는 사람이 쉬는 시간에도 엎드려 있으니 몸통이 소리치기 시작한다. "제발 좀 그만 앉아 있어!!" ​

그대로 복도로 나갔다. 초췌한 눈과 걸음걸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어슬렁어슬렁 복도를 돌아다녔다. 뒷짐을 졌다가, 허리를 폈다가, 목을 세웠다가. 그래도 그 좁은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다 움직였다. 아, 하지만 두통은 사라지지가 않는다. 눈은 여전히 빠질 것 같다. 그냥 엎드려 잠이나 잘걸... 왜 귀찮게 밖으로 나와가지고...


그렇게 두통과 안구통을 떠안은 시체처럼 복도를 돌아다니던 중, 갑자기 저 멀리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희망이 보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햇빛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 생각해 보니 이 건물은 유난히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내가 이렇게 어둡고 축축한 공간에 하루 종일 있었다는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당장 빛으로 향했다. 창문을 향해 쏟아지는 빛의 한가운데에 몸을 담갔다. 목욕탕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온몸을 빛이 감쌌다. 긴팔과 긴 바지를 입고 있으니 당연히 빛은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UV 차단? 기미? 주근깨? 다 필요 없다. 이 깨질듯한 두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눈을 감았다. 따뜻했다. 겨우내 음지에서 숨죽여 있던 나무들이 너무 깜짝 놀라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축축한 땅속에 숨어 있던 새싹들이 어깨를 펼 수 있을 정도로 따뜻했다. 빛은 이내 얼굴을 지나 목덜미, 머리카락 한올, 손등, 손바닥, 하나하나를 스쳤다.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햇빛 한 줄기가 그렇게 가느다란 줄 몰랐다.


어라? 이상했다. 한 3분 정도 지나자 정말로 뇌와 눈알이 어디서 샤워를 하고 온 것처럼 시원해졌다. 아침에 막 학교에 왔을 때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은데. 누가 내 몸에 전기 배터리를 꼽고 충전을 시킨 것처럼,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두통이 찾아오겠지.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다시 교실로 향한다. 하지만 남은 2시간 남짓의 수업을 듣는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두통과 안구 통은 재발하지 않았다. 물론 피로감은 다시 올라왔지만, 3분 동안 충전한 것치고 배터리는 꽤나 오래갔다. 햇볕을 쬐라는 의사 선생님들의 말이 이제야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빛은 에너지다. 힘이다. 원동력이다. 무언가가 움직이고 살아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식물을 참 잘 키우는 어떤 분이 말씀하셨다. 이 아이들은 물과 햇빛만 있으면 이렇게나 잘 자란다고. 물이 생명을 담는 그릇이라면, 그 생명을 키우는 것은 바로 빛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나는 긴장을 하면 머리가 아픈 타입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빛을 쐬면 효과가 참 좋다고 하는데, 따뜻한 기운이 두피의 긴장을 싹 녹여주기 때문이다. 혹은 머리를 두드리는 지압법이나 마사지도 참 좋다고.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내기에서 이긴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라 뜨거운 햇빛이었던 것처럼. 무언가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강한 힘이 아닌 따스한 평온함일 때가 있다. 지금까지 참 고생 많았다고. 이제는 이 따스한 그늘 아래에서 쉬어가도 된다고. 그렇게 팽팽했던 긴장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리도 붙잡고 있던 것들이 한순간에 놓아질 때. 우리는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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