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든 아이, 내 속에선 고드름을 피운다.

영국 아동상담

by 영국 엄마달팽이

15살은 된 것 같은 이 아이.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 겨우 만 8세를 넘긴 아이인데, 도대체 이 멋지도록 엄숙한 차분함은 어디서 오는 건지...

만나고 있던 아이들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이 아이를 만났다. 얼마나 예의 바르고 점잖던지. 나는 꼭 아주 매너 좋은 청년과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의 놀이성이 다 해제되고 아주 아이를 어른스럽게 대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이와 앞으로 만날 10주간 10번의 상담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이제 원하는 장난감을 골라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이 아이가 좋아할 놀잇감은 여기 없을 것 같았다. 너무도 어렸다, 상담실에 준비된 모든 장난감이, 이 아이에게는. 자동차. 외계인. 동물. 로봇. 자동차 경주장. 의사놀이. 인형. 음악 기구. 이 장난감 가득한 초등학교 놀이실에 이 아이는 너무 큰 아이, 성숙함이 가득 느껴졌다.



다른 남자아이들과는 다른 것을 고른다. 큐브 맞추기를 시작한다. 오랜 시간 집중을 했다. ‘어렵네요’ 한 마디 던지고는 나의 눈을 바라본다.

어린아이가 한참 어른인 사람과 이렇게 눈을 잘 마주치는 것도 어려운데. 그리고 나와 대화를 한다. 겨우 만 8세 아이가 40살, 처음 본 어른과 아주 점잖게, 그리고 아주 예의 있게 대화를 나눈다.

‘대체 뭐지, 이 아이....’




놀 것이 마땅찮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림, 그려도 돼요?”
“그럼. 물론.”
“선생님도 그리실 거죠?”
“나도 그렸으면 좋겠어? 그럴까 그럼?”
“네.”

아이가 고른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물감을 섞고,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는 아이. 아무리 계속 보아도 초등학교 상담실에선 보기 힘들 그런 아이. 이 아이의 차분함은 어른인 나를 설레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데 나는 곧 그 모습을 차분함이라 부르지 않았다.
‘어른스러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아이의 침착함이, 그 어른스러움이, 그 멋진 차분함이, 내 속을 울린다. 앞 시간에 만난 너무도 천진난만한 아이와 자꾸 대조가 된다. 천진한 아이, 그러나 그의 세상은 슬퍼서, 내 속에는 비가 내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의 상황들에 방해받아 나이를 잃은 것 같은 이 아이의 ‘아이스러운’ 모습이, 내 마음에 눈을 내린다.

차고, 엄숙한 그러나 아름답고 멋있어서 속을 뻔했지만, 눈. 너무 춥다. 아름답지만 결코 따뜻해지지는 못하는 그런 눈.


내 마음에 비가 내리면 나는 슬프고만 만다. 그러나 내 마음에 눈이 내리면, 나는 얼어버린다.




내 마음을 얼리는 아이. 상담을 마치고 운전하고 올아오는 동안 내내, 눈 같은 그 아이를 머릿속에서 계속 만나고 있었다. 늘 화가 나 있고, 분노에 찬 아이는 내게 한 여름 타들어가는 태양 빛을 떠올리게 하고, 기력 없고 무기력한 아이는 내게 춘곤증을 떠올리게도 한다.

오늘 나는, 아름다운데 자꾸 눈물이 나는, 한 겨울의 눈꽃을 떠올리게 한 아이를 만나고 왔다.




선입견이 될 수도 있지만 감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는 정보. 그 정보라는 것은 늘 우리로 하여금 선을 넘게도 하고 다른 선을 보게도 한다. 그래도 보편 다수의 정답 같은 감정이라는 것은 늘 있다. 감정의 세세한 표현까지는 다를지 몰라도 감정선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 있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일에서 오는 감정선 같은 것.

2년 전, 6살 때 아버지를 잃은 아이. 어떤 표현을 보일지, 어떤 마음을 그려낼지, 어떤 해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 결국은, 모두 슬픔. 모두 그리움.




20살 청년, 30살 성인에게서도 보지 못할 수 있는 그런 성숙함을 나는 오늘 겨우 8년 산 아이를 보고 왔다. 내 속에서는 고드름이 느껴진다. 눈물이 흘러 얼어버린다.

아이를 사랑했는지 아니었는지도 상관없다. 부모를 향한 아이들의 그 강렬한 사랑, 애정. 그 사랑을 더는 쏟지 못하는 아이

부모가 되어 계속 싸울 바에는 헤어지는 게 아이에게 낫지 않은지 내게 묻는 사람들. 그러나 나는 선택하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선택은 어디에도 없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것, 그것만으로 아이들의 삶은 이미 슬픔 한가운데 절벽이다. 나는 그 슬픔의 깊이를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잴 수 없는 슬픔이다. 강한 그리움은 피말리는 고통이다.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많았길 바라는 내 마음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와 잠시 함께하는 그 시간이, 아이의 슬픔의 깊이를 더 깊게만 하지 않을 수 있을지 바랄 뿐.그저 일주일 단 한 시간.


세상의 모든, 부모를 그리워하는 영혼들에게 기도를 올릴 뿐이다.
‘아주 잠시라도, 잊고 숨 쉴 평화를 먼저 주소서. 그러고 나서 아름다운 그리움으로든 뭐든, 만들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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