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아동 상담>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ADHD가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사용하는 정식 명칭이지만 영국에서는 주의력 집중만 어렵고 과한 행동은 없는 경우 'ADD'로 자신을 따로 분류하는 사람도 흔하다)
교실 수업을 이행하기가 어렵다는 8살(만 7세) S를 만났다. 오늘 내가 만난 아이는 교실에 앉아있는 것이 어려워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였다. 나와 처음 만나는 날. 이 아이와 잘 연결되어야 하는데, 거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여전히 '알 수 없다'다. 어떤 아이는 짧게 또 어떤 아이는 오랫동안 상담사에게 마음을 놓지 못한다.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라고 표현하기 전에 상대에게 마음을 '놓는'단계를 먼저 넣어둔다.
마음을 '열 수' 있느냐 묻지 않고 마음을 '놓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나라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함에 아무런 추가적 에너지가 필요해지지 않기까지 가는 길, 마음을 놓을 수 있으면 된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너무도 멀리 있는 단계다. 무엇을 억지로 숨기거나 잡아놓거나 가두어져 버린 마음의 에너지가 내려놓아지는 단 한 시간, 그 한 시간의 공간에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 거기까지 가기가 무척이나 어렵고 복잡하다.
상담시간 전 학교 복도에서 아이를 먼저 마주쳤다.
좋은 기회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안녕 S야. 나는 OO라고 해. 반갑다."
엄마 미소가 내 얼굴에 장착되었다. 의도도 없고 억지로랄것도 없는 미소였다. 아이들을 보면 늘 편안하고 기분 좋은 얼굴을 보이려 노력하는 나의 습관이다. 오늘 하루, 나와 대화를 하건 안 하건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의 몇 초 기억 속에 편안한 얼굴로 내가 스치기만 해도 된다. 그 짧은 순간들 동안 만이라도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불쾌한 스트레스 호르몬이 방출되는 것만 막으면 된다는 것에서 생긴 내 행동습관, 상담의 생체학적 영향에 관한 연구논문들이 만들어낸 습관들 중 하나이다.
눈을 맞추는 것이 어렵지 않은 아이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랬다. 짧은 순간조차도 눈을 맞추지 못하는, 맞추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 처음은 맞추다가 나중엔 맞추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목표는 그저 '그 순간'일뿐이다. 지금 이 순간, 눈을 맞추었느냐 아니냐, 그거면 됐다. S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나중에 보자 S야."
아침 11시 35분. S와 내가 상담교실에서 만났다. 처음 보는 이 아시아인 아줌마에 대해 얼마나 신기할까, 불편할까. 나는 내가 아시아인이란 걸 자주 까먹는데, 오늘은 용케도 그것을 생각해 냈다. 나는 그들과 많이 다른 모습의 사람이라는 것을 오랜만에 기억해냈다. 나는 아이의 얼굴 표정과 아이의 호흡 패턴에 집중했다. 특히 아이의 눈을 놓치지 않는다. 아이의 눈과 호흡의 움직임을 지켜볼 행동의 속도감에 집중한다. 이런 탓에 언제나 늘 최초의 몇 세션 동안 나의 두 눈과 관자놀이 주변에 늘 피가 집중적으로 몰리는 느낌을 받는다. 첫 만남은 늘 머리로 에너지가 과하게 집중된다.
나에 대해 설명하고, 우리의 세션 시간에 대해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우리의 안전과 세션의 비밀보장(과 그 한계까지)에 대해 아이의 수준으로 설명해 내는 것은 언제나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아이가 알아듣지 못하니 넘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알아듣도록 반드시 설명의 수준과 전달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이제 시작이다. 장난감 넘치는 이 공간에서, 생전 본 적 없는 어른 한 사람과 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늘 궁금하고 늘 걱정된다. 최대한 주변 배경으로 존재하려 노력하고 최대한 안전한 배경으로 존재하려 내 몸의 위치를 확인한다. 너무 옆으로 가지도 못하고 너무 멀리 있지도 못한다. 아이의 시선의 반경은 아이마다 다르다. 아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대와의 거리도 다르다. 나는 그것을 최대한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아이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나의 마음이 너무 달려가지 않게 최대한 멀리,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시야 안에 내 몸의 위치를 잡아야 한다. 아이가 고르는 장난감이 가진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나중이다. 우선은 내 몸의 위치를 잡아야 한다. 장난감과 아이와 내 몸이 삼각형을 이루고 이 셋을 다 담아내는 공간의 크기와 이 삼각형의 크기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한다. 두 발을 앞으로 뒤로 옮겨가면서 나는 내 위치를 잡아 그 위치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오늘 알아낸 나의 위치는 여기다.
남자아이들의 보편적 첫 장난감으로 S도 다가갔다. 자동차들을 만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몸을 느낄 수 있는 시야 안에만 넣어둔 채 침묵으로 안정감을 건네주고 있었다. 말을 던지지 않고 의성어 추임새만 넣어 주었다.
"으음."
서서히 한 단어씩 공간을 비집고 내뱉었다. 어느 순간에 나의 한 마디가 자리하느냐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오늘은 첫 만남이고, 이 아이는 이 공간의 모든 분위기, 공기의 흐름이 모두 새로울 것이다. 그 새로움이 신기하고 반가운 아이도 있지만 그 새로움이 불편하고 긴장되는 아이들도 많다. 대부분 이 공간에서 나를 만나는 아이들은 후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나를 만나도록 시간이 배정된 것이다. '어른'사람에 대한 편안함과 호감이 있는 아이들이라면 나를 만날 이유가 없다. 나를 만나는 아이들은 제 마음의 어느 부분이 '불안'하고 '불편'하기 때문에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하여, 나는 최대한 첫 세션에 해를 가하지 않는 배경으로 섞여야 한다. 첫날 어른의 의욕으로 섣불리 가까이 다가갔다간 앞으로의 세션은 없어지거나 있어도 굉장히 오래 걸린다. 한 아이당 내가 만나기로 정해진 세션은 10번, 10주이다. 길지 않은 그 기회를 최대한 잘 이용해야 한다. 아이의 삶에 내가 들어온 이상 나는 최대한 좋은 기억을 만들어내 아이의 마음을 녹여내야 한다. 해결은 없다. 단지 갇힌 곳 작은 조각 빛이 들어갈 틈을 만들어 주는 것, 꽉 묶인 끈의 끝자락을 열어주는 것, 그 정도를 위해 10번의 기회를 제대로 집중해야 한다. 10번으로 달려갈 속도 조절, 그것이 건이다. 아이의 몸과 마음의 분위기 파악, 그리고 아이의 몸과 마음의 속도를 파악해 내는 것, 그것에 사활이 달려있다.
"음. 자동차네."
아이에게 말을 걸진 않는다. 그저 나는 아이가 고른 물건에 집중하면서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를 건넸다. 아이가 내게 자동차를 건넨다. 덥석 받지 않는다. 의사를 물어봐야 한다.
"나한테 주는 거야? 내가 그 자동차를 받을까?"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동차를 오른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다. 아이가 취할 다음 행동을 알 수가 없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먼저 취하기 전까지 그대로 가만히 있는다. 아이가 자동차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아이의 행동을 보아준다. 아이가 나를 흘끔흘끔 보기 시작한다. 나는 그 신호에 말을 건넸다.
"내 자동차는 뭘 할까? 너 노는 곳에 같이 놀까 아니면 여기 가만있을까? 내 자동차는 뭘 했으면 좋겠어?"
같이 놀자고 한다. 그러면 나는 아이가 노는 방식 그대로 따라 놀기 시작한다. 아이보다 신나게 들떠서도 안되고 아이보다 쳐져서 지루해 보여도 안된다. 언제나 나의 리듬을 아이의 리듬에 맞추어야 한다. 보조를 정확히 맞추는 것, 그것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출발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교류를 한다는 것, 보통 아이들에겐 별스런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에 불편함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조금 다르다. 20분을 가만히 서서 그 어떤 장난감도 골라내지 못한 5살 여자아이도 있었다. 10분여 좋은 출발은 잠시 뒤 올 폭풍을 위한 디저트였다. 전채 샐러드가 아닌 디저트. 완전무장 고행 전 에너지를 담아 줄, 모두를 속일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뭐, 알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난 늘 언제나 최고로 힘들 상황을 예상하는 마음으로 상담실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사실, 예상 밖이었긴 하다. 첫 만남이었고 첫 10분이 너무도 유쾌했기 때문에.
아이가 상담실에서 도망을 쳤다. 교실 문을 열고 빛의 속도로 건물 밖까지 냅다 달렸다. 비상이다. 나의 상담실을 벗어난 공간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의 보조 교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 아무도 그 아이를 따라나설 사람이 없다. 건물 밖으로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상담사 수련 과정에서 상담사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견디기 힘들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회기가 있다. 어떤 상담사는 아무 말도 않고 침묵으로 버티는 아이를 대하기가 힘들거라 이야기했고, 또 어떤 이는 과격한 행동으로 상담시간을 채울 아이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나의 최악의 시나리오는 무기력한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었다. 화가 나서 날뛰는 아이보다 슬픈 눈으로 포기해버린 듯한 조용한 아이들을 그저 바라봐야 하는 것이 나에겐 제일 어려운 마음으로 버텨야 하는 1시간, 여러 세션일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와 반대인 기력 넘치는 시나리오를 만났다. 활기차다 못해 로켓처럼 도주해버리는 아이를 만나다니.
아이는 계속 여기저기 도망 다녔다. 잠시 뒤 보조교사가 우리를 발견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아이에게 말을 건다. 나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그저 보조교사를 도와 아이가 학교 밖으로까지는 나가지 않게 한쪽 망을 서주는 일 외에는 할 수가 없다. 지금 나의 어떤 행동이 저 아이에게 어떤 이미지를 줄지 모른다. 하여 무엇을 하는 것도, 무엇을 하지 않는 것도 모두 계산에 넣어야 한다. 나는 그저,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지, 그냥 '이런 일'이지, 최대한 진정하고 아무것도 판단하거나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분위기를 전달하려 내 몸과 얼굴 표정을 끊임없이 체크하려 노력했다. '너의 안전과 나의 안전'에 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아이를 향해 나의 눈과 온몸을 통해 에너지를 전달하려 애썼다. 세션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저 아이를 어떻게 상담실로 데려가 제 가방을 들려서 하굣길 기다리는 엄마에게 잘 보내줘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이를 터치할 수 없는 규정 탓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말, 말 뿐이었다.
'오늘 아동과의 첫 만남의 첫 슈퍼비전의 내용으로 가져가기엔 이건 너무도 드라마틱한 전개 아닌가...'
아이를 잡으러 다니다 때 이르게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온 아이의 어머니에게 우리의 모습이 목격당했다. 너무도 마주하게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발생해버렸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엄마에게 혼날 아이, 우리에게 불편할 저 어머니의 마음, 아이를 보고 당황할 엄마의 마음, 순식간에 복잡함이 몰려왔다. 아이의 어머니는 내게 사과를 하고 아이를 혼냈다.
"대체, 왜 어른이 두 명이나 너를 잡으러 다녀야 하는 거지? 넌 또 교실에 못 앉아있은 거야?"
아이의 어머니가 가질 마음이 나의 일처럼 스치기 시작했다. 아이를 나무라는 부모의 마음이 있을 것이고, 나와 보조교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을 게지. 그런 어머니를 보는 나의 생각은 같은 '엄마'라는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드는 마음이었다.
내게 사과를 하시는 아이의 어머니께 나는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네 버렸다. ‘아닙니다’ 하고 그냥 돌아서 갔어야 했는데, 상담사에서 엄마라는 타이틀 전환이 빛의 속도로 이어져버렸다. 실수를 한 것 같다만, 이미 벌어져 버린 일...
"어머니, 제 생각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이게 직업이잖아요. 저는 겨우 하루 1시간 아이를 대할 뿐이에요. 어머니는 이 아이와 24시간, 7일, 365일을 달리셔야 할지도 모르지요. 저도 아이 엄마라서 늘 달리네요. 저희 걱정하실 에너지를 아끼셔서 어머님 아드님이랑 어머님 자신만 더 생각하는데 그 에너지를 다 쓰셨으면 해요."
어머니 눈썹의 앞머리가 올라가고 뒷머리가 내려가면서 눈가에 힘이 풀렸다. 고개를 우측 5도 정도 기울어뜨리고는 말씀을 던지셨다.
"대체 아이가 왜 저런 걸까요? 전 너무 지쳐요. 힘들어요."
"네. 그러실 거예요. 어머님 힘들실 거예요. 그런데 아이도 힘들답니다. 저렇게 막 뛰고 웃고 하는 게 저는 좋은 거 같고 주변 사람은 힘들게만 하는 거 같지만, 저 아이도 힘들 거예요. 저렇게 계속 뛰어다니고, 웃고 하는 거, 아이도 힘들지 몰라요. 아이의 마음이 어떨지, 왜 그렇게 뛰어다니고만 싶은지, 오랜 시간 지내면서 잘 알아보겠습니다. 최선을 다 할게요. 시간을 두고 같이 기다려보기로 해요."
처음 보는 내게, 자신의 고됨을 털어놓으며 같이 내려놓은 그 눈빛을 잊기가 어렵다.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같은 부모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여러 갈래다. 나 자신이 부모가 되기 전에는 아이에게만 오롯이 집중되던 마음이었는데, 부모가 되고 이제 그 마음이 나뉘어 아이와 부모 양쪽으로 향한다.
아이와 세션을 마무리하고, 다음 아동과의 상담시간을 준비했다. 교실 창을 통해 밖에서 노는 학급의 아이들과 그들을 품어 내려앉은 하늘을 보았다. S에게 이 실내공간은 어떤 존재일까. 이 아이에게는 교실, 실내, 이런 공간이 어떤 느낌인 걸까. 교실에 앉아 있기 힘들어 수업을 정상적으로 받을 수 없는 아이. 제 아무리 수많은 장난감으로 가득해도 여기보단 텅 빈 밖인 걸까. 오늘만 그런 걸까 아니면 늘 이렇게 될까. 만약 실내라는 공간에서 도저히 편안함을 찾아낼 수 없는 아이라면, 앞으로 아이가 참아내야 하는 이 막힌 공간의 생명력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실내공간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내야 하는 학교라는 시설을 살아내야 하는 이 아이의 '학창 시절'은 어떻게 그려지게 되는 걸까.
다음 학생을 만나고 난 뒤 나의 하루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상담 프로젝트 매니저와 슈퍼비전의 시간을 가졌다. 다음 주부터 보조 교사는 상담실 문 밖에 50분 동안 서 계셔야 한다. 이제 아이가 달려도 나는 같이 달려줄 수 없다. S가 상담실 공간 안에서 시간을 갖는 것이 가능할지 아닐지를 판단해야 하는 앞으로의 몇 회기도 있을 것이다. 학교 측 정책이 우선인 학교 상담 세션이라, 학교 측과의 회의도 추가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나의 개인 상담실 아동이었다면, 아마 다움 주 S와의 상담 세션은 가든에서 진행됐을지도 모른다. 가든에서 시작해 가든으로 끝나도 좋고, 가든에서 시작해 실내로 들어가도 좋다. 아이가 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느낌인지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 날 하루 그런 것인지, 늘 그런 것인지, 무엇이 아이의 불편함을 야기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내 할 일의 시작도 끝도, 그렇다고 중심도 아니다. 나의 모든 세션의 방향은 생애 초기인 아이들에게 중요한 생체학적인 호르몬 조절의 기회 제공에 집중되어 있다. 생애 초기인 아동기, 이 아동기에 아이의 생체 내 호르몬 방출 패턴이 잘 형성되어야 한다. 행동을 조절하는 호르몬의 방출 패턴이 부정적 방향으로 자리 잡지 못하도록, 그렇게 굳어지지 않도록 그 흐름을 끊어내야 하는 것이 나의 우선 과제이다. 그리고 좋은 호르몬이 몸 안에 가득해서 몸의 행동이 조절되는 좋은 경험을, 그 '경험'을 아이의 몸이 해 내고 그런 경험들이 몸에 '기억'되도록 경험의 반복을 쌓아내야 한다. 나와 함께 하는 시간 그런 호르몬이 아이의 몸에서 스스로 나와 몸 가득 채워지도록 돕는 것이 내 개인적 추가적 임무다.
앞으로 실내로 들어가지 못할 아이라 할 지라도, 실내로 들어가는 것이 최종 목표여선 안된다. 우선은 아이의 뇌와 신체가 좋은 호르몬 방출을 경험해보고 기억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호르몬이 나쁜 호르몬을 이겨야 한다. 면역세포가 몸안에 가득해야 암세포를 이겨내는 것과 같은 이치임을 뇌신경학에서 얻어내었다. 나를 만나는 한 시간 동안 아이의 생체 호르몬 조절이 나와 함께, 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 그것이 나의 일차적 목표이다. 아이 몸 안의 스트레스 호르몬 코티솔의 방출을 멈추고 호기심과 탐색, 몰입과 즐거움을 도와줄 호르몬 옥시토신과 오피오이드의 방출을 돕는 것을 목표로 시작한다. 그것을 하려면 아이와 내가 '연결'이 되어야 한다. 연결의 핵심은 아이의 분위기를 같이 타는 것이다. 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그리고 같은 색깔로 물들어야 한다.
나는 이제 아이의 세상에 또 한 배경 조각으로 추가되었다. 아이는 나를 만났고, 나를 만나는 그 시간은 아이의 삶에 있어 추가된 또 하나의 '환경'이다. 아이의 세상에 발을 들인 이상, 나는 조심히 아이의 기억에 들어가야 한다. 도움을 주겠다고 들어가는 시작은 옳지 않다. 해가 되지 않겠다는 태도, 또 하나의 부담되는 환경으로써 존재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태도를 늘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최대한 조용하고 가볍게 아이의 시간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고 나서 도움이 될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 내야 한다. 나는 이 순간들이 늘 조심스럽고 또 가슴 벅차다.
아이의 삶에 내가 들어간 것만이 아니다. 나의 기억에, 나의 삶에도 아이가 들어온 것이다.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의 좋은 기억은 곧 내 생의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된다. 아이와 나, 우리는 함께 한 시공간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운전길에서 나는 나의 꿈이 계속 떠올랐다. S가 뛰어다니면 편안할 곳인지 궁금해졌다. 숲 학교. 산 오두막 학교. 숲에서 모든 종류의 책을 읽고, 나무들을 뛰어 넘나들며 신체 호르몬을 활성화시키고, 나뭇가지, 돌멩이들을 모아 건축과 예술 공작을 하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감자 고구마 밥 국 죽 샐러드 과일 등으로 함께 점심을 만들어 먹는 하루. 그런 자유와 몰입이 가득한 즐거움과 몸과 마음이 독립되는 과정을 배워나가는 학교.
여전히 상상하는 나의 꿈같은 학교. 그 꿈이 다시 또 아름답게 공상되는 날이다.
Forest School. 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