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국 엄마달팽이 Dec 12. 2020

S가 나타나지 않았다

<영국 아동상담>

S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한 달리기로 나와 첫 만남을 한 이후, 오늘이 2번째 상담시간이었다. 오늘 세션,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 막중함이 있었다. 안전에 관한 규칙은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잘’ 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전하다는 것, 상담이 아니라 ‘너’와 ‘내’가 항상 안전할 것이라는 것을 알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상담 시간 10분 전, 늘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상담실로 돌아오던 S가 보이지 않았다. 보조교사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어디선가 나타날 것인가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학교 상담 프로젝트 매니저도 함께한 시간이었다. 상담 시간 5분이 지나도 아이와 교사는 보이지 않았다. 매니저가 상황을 알아보러 가셨다. 잠시 뒤, 아이는 학교의 다른 2차 건물에 체류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앞으로 계속 상담을 받을 수 있는지, 아직도 회의가 진행 중인 듯했다.

S를 만나지 못했다. 매니저가 미안하다고 전했다. ‘내게 미안할 게 무어...’ 그런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묻지 않고는 계속 떠오를 궁금함이었다.
“이 학교 특수교사(코디네이터)가 S를 위해 무언가를 하겠죠?”
영국의 거의 모든 학교에는 특수교육 관련 교사 혹은 코디네이터가 배치되어 있다.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 교사가 이 학교에 배치되어있는지.”
매니저는 학교 시스템에는 정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담 전문 기관에서 파견된 분이니, 해당 업무의 처리에만 능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S가 우리 프로젝트의 상담을 못 받아도, 다른 도움이 준비되는 거겠죠? 그 아이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잖아요. 학교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고, 본인도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게 확실하니, 국가 의료 시스템에서나 학교 시스템에서 다른 지원이 있겠죠?”
“거기까진 아직 모르겠네요.”


우리는 학교에 배치된 외부 서비스 제공자이다. 학교 내부 일정은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정보가 어디까지 공유될 것인지는 학교마다, 케이스마다 다르다. 알 수가 없어서 더 그랬을까, 나의 가장 큰 걱정은 멈춰지지 않았다.
“캐런, S는 늘 그 보조교사랑 함께 하는 것 같던데, 그렇죠?”
“네, 맞아요.”
“이 학교에서 그 보조교사에게 제공하는 지원은 있겠죠? 카운슬링 스킬을 알려준다거나, 보조교사 본인을 위한 셀프케어나 카운슬링이 지원된다거나 하는 거요.”
“없을 것 같은데. 보조교사의 업무로 S를 돌보고 있는 것이니까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의문형으로 포장했을 뿐이다. 보조교사에게 그런 ‘제대로’된 지원이 있는 경우를 아직까지는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나의 경험의 양이 방대하지 못하니 나의 경험이 현상을 말해준다 보기 어렵다. 다만, 상담수련 중 만난 많은 보조교사들이 자비로 상담훈련을 받고 있다는 것이 늘 나를 아쉽게 했었다.


학급 보조교사는 담임교사를 도와 수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의 부분적인 질문이나 도움을 주는 직무를 위해 고용된다. 영국의 교실 시스템이다. 어느 날 하루, 잠시, 부분적 도움이 필요해 보조교사 옆에 앉는 아이들과 S는  다르다. S는 하루의 대부분을 보조교사의 도움 없이는 지내지 못했다. 종일 집중을 못하고 안정을 못 갖는 아이. 그런 아이가 하루 종일 만나는 건 해당 보조교사 한 명이라는 소리가 된다. 이 부분이 나를 염려케 했다. 늘 보조교사와 함께인 S. 학교생활의 상당 시간을 아이는 보조교사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가 있었다. 홀로 오랫동안, 그래서 아주 깊게. 보조교사의 반응이 곧 아이의 세상의 이미지가 된다는 것.

아이를 생각하던 나의 시선은 다시 빠르게 보조교사에게로 옮겨간다. 아이만 그녀와 종일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도 종일 그 아이와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출근을 해서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그 아이는 보조교사와 함께였다. 보조교사의 정신 건강과 그로 인한 신체 건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저번 주에는 보지 못하던 것이 갑자기 커튼 쳐지듯 보이기 시작했다. 늘 뛰어다니고 늘 불안한 아이의 모습을 눈과 귀, 그리고 몸으로 목격하는 한 사람.
‘그녀의 피로도 수준은 괜찮을까?’  
‘스트레스의 지속적 노출에 의한 독성 스트레스 혹은 2차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도 있을 텐데.’
‘보조교사는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다루는 스킬,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스킬을 갖고 있는 걸까?’
걱정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지난주 나와 운동장을 누빈 그녀는 아주 어린 보조교사였다. 감정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아이들, 행동적으로 도전하는 아이들을 다룰 스킬을 갖고는 있는지, 마음이 늘 강단 있게 준비되고 퇴근 후에는 어딘가에서 다시 잘 말랑말랑해지는지, 그녀의 일상이 궁금했다. 나의 궁금증은 내 입을 열고 매니저의 귀로 옮겨가고 있었다. 나의 염려와 궁금증이 내 몸안에 가만히 있지 못했다.
“음,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그러네요. 아이의 치료에 보조교사의 영향력이 심하게 밀착된 상황이 되네요. 보조교사에게 스킬이 없다면 아이의 상태는 더욱 악화될 수도 있네요.”
매니저의 발언에 나는 사실 조금 실망했다. 나는 아이의 관점만이 아닌 보조교사의 관점을 말하고 싶었었다. 아이에게로만 우리 모두의 시선이 갇히는 것이 아쉬웠고 또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멈추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어지간히도 중요하다 생각됐나 보다.
“아이뿐 아니라, 보조교사도 위험한 거 같아요. 저 아이의 반응을 홀로 하루 종일 견뎌야 하는데,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이라면, 그 보조교사의 정신건강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아이의 부모보다 아이를 더 오래 보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교사는 상담사도 아니라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알고 있는 건지, 걱정되네요. 아이랑 보조교사가 시스템의 바깥으로 고립되는 것 같이 보여서 걱정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구멍일까. 한 공간에 엮인 관계자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 각자에게 주어진 일만을 신경 쓰고 그 개인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동안 그 연결의 사이사이가 끊어져 보이지 않는 상황. 아이를 케어하면서 아이나 부모의 문제와 해결로 간단하게 볼 것이 아니라, 아이와 관련된 사람과 그 아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든 연결도를 보려고 노력한다. 즉 아이의 미시적 그리고 거시적 환경을 바라보면서 관련 시스템의 영향력과 관련도를 고려해 문제를 해결하는 Systemic approach를 모델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이와 부모에게만 과하게 집중되어 있기 쉽다. 그러는 사이 확장된 사회적 시스템이나 환경 요소인 주변 3자들을 고려해보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그 3자의 관점도 놓치게 된다. 나는 지금 그 3자를 생각하고 있다. 그 3자인 보조교사와 S의 끊임없는 ‘뫼비우스의 띠’가 보인다.

아이들의 정신건강을 다루는 데 충분한 스킬이 없어 2차적 스트레스로 힘겨운 시간을 겪다 결국 선생이라는 직업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다는 영국의 연구논문이 자꾸 생각났다. 다음 주부터 내가 찾아볼 또 한 명의 사람. ‘그녀의 눈에 자주 띄자’ 마음먹는다. 아이를 위한 시스템 접근법에서도 우리는 그녀를 챙겨야 한다. 아이를 위한 그녀의 노고를 알아주고, 무엇이 필요할지, 무엇을 줄지, 생각해야 한다.

짧게 나누었던 나와 그녀의 대화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친다.
“자주 이렇게 S와 복도를 걸으시나요?”
내게 친절하지만은 않은 미소를 던졌었다.
“자주요? 거의 매일이죠.”
그랬다. 그녀는 살짜기 짜증을 섞어 대답을 던졌었다. 귀찮다는 건지 놀리냐는 건지 뭐 그런 미소 아닌 미소. 처음 본 내게 그런 형식적 느낌의 미소를 던질 때, 나는 사회생활이 시작인 어린 성인의 그저 숨 죽지 않은 태도라고만 생각했었다. 엄마 미소로 화답하며 그녀를 ‘가이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내 가이드가 한 발 삐끗했구나 싶다. 그녀의 짜증은 그녀의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S 때문이건 아니건, 나의 사회적 시스템 안에 그녀도 들어온 이상, 나는 나의 영향력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녀가 지금 나의 정신영역에 영향을 미쳤듯이 말이다.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녀와 잘 서있는 것, S의 곁에 함께 서있는 동료애라고 보아도 좋다. 아동에게 하듯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주변인으로 존재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나를 노출시키면서 그녀의 동료로 내가 주고받을 것이 무엇인지, 잘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이 모든 게 8살 아동 S를 위한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 S를 중심으로 우리 제3자들은 무언가를 주고받는다. 내가 준 것이 내게 돌아오는 것. 우리 모두는 결국 도미노 블록 중 하나라는 생각이 한 번 더 새겨지는 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교실에 앉아있는 것이 힘든 8살 아이 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