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어른들
"아빠가 하늘로 가셨어. 이제 아빠는 집에 오지 않아. 그래도 우리 둘이, 잘 살면 돼."
"음............ 엄마, 나 놀이터 가도 돼요?"
사랑하는 아빠를 잃은 어린아이, 운동장을 뛰어다닌다.
그네를 타고 잡기 놀이를 하고 장난감 칼을 들고 다니며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닌다. 이를 보는 엄마는 마음 한편 안도의 빛을 느낀다.
'아이라 다행야. 잊을 수 있어서. 저렇게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거야...'
"아빠가 돌아가셨단다."
믿을 수 없는 말에 잠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 또한 갑자기 몸을 움직이고픈 욕구에 대화의 화제를 돌리는 아이들도 있다. 움직이고픈 욕구는 믿고 싶지 않은 고통을 완화시키라는 몸의 욕구인 경우도 있다.
어떻게든 몸이 이뤄내야 하는 발달의 '과정'에 놓인 아이들이기도 한다.
본능을 이길 수 없는 단계에 있다. 몸을 움직이며 발달을 이루어내야 하는 본능이 아이들을 이끈다.
애도 상담은 언제나 무겁다.
아이든 어른이든, 사랑하는 이를 보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사랑하는 그 사람의 단지 그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 그 얼굴과 손을 만지지 못하는 것 그 이상이다. 이때까지 살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난다는 것의 변화의 중압감은 슬픔, 고통, 그리고 두려움,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슬픔의 모양이 어른들의 슬픔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네 어른들의 슬픔에 대한 그림. 슬픔의 모습이 늘 그렇게 우울하고, 기력이 없고, 충격에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는 고요와 적막 그 자체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아이들은 아직 세상의 모든 경험을 구경하지 못했고 그에 따른 감정의 경험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이의 슬픔이 늘 언제나 고요하고, 내면적이고, 무섭도록 시린 침묵이 드리워질 것이라고 여기기 쉬운 우리 어른들. 그래서 우리들에게 아이의 활동성은 마음을 놓게 해주기도 한다. 아이가 슬픔을 완벽히 경험하지 않거나, 혹은 슬픔의 고통에 편안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아 우리를 안도하게 만들기도 한다.
성장과 발달에 필요한 욕구를 채우느라 바쁜 아이들.
한 가지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때도 있다. 아이들은 늘 자신의 시간에 맞춰 다시금 슬픔과 괴로움과 고통의 순간을 방문하고 또 방문한다. 잘 뛰어놀다가 갑자기 우울해하고, 잘 웃다가 다시 화가 나고, 잘 자다가 오줌으로 이불을 적시기도 한다. 아이는 자신의 정서적 불편함을 자신의 시간에, 자신의 속도에 맞게 늘 방문하고 방문하면서 경험한다. 안전한 퇴행이고 정상적인 멈춤이다.
또한, 아이들의 슬픔이 어른의 슬픔과 크게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언어적 표현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 지금 경험하는 이 사건이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기도 어렵고,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의 감정을 대신 표현해주어야 한다. 감정의 이름을 붙여주어야 하고, 지금 느끼는 감정이 왜 생기는 것인지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경험한 바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적절하며 효과적인 치유적 행위이다. 이 모든 과정이 삶을 배우는 순간들이 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해 나가야 하는지 배우게 된다. 아이들을 대신해 늘 언어로써 표현해주며 옆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 어른들이 잊지 않고 해주어야 하는 일이다.
버티기 힘든 삶의 사건에 대한 감정, 그 감정의 표현에 작은 물꼬를 트는 것이다.
감정 표현의 작은 물꼬를 틔우지 못하면 이 어려운 감정은 곧 행동으로 표현된다. 감당하기 힘든 그 어떤 감정도 우리의 몸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그 물꼬로 모든 물줄기가 다 빠져나가 주기도 하는 행운이 올 수도 있다. 표현되지 않아 갇혀버린 불편한 감정은 다음의 경우처럼 몸으로 표현된다.
- 부적절한 행동
- 학습에 방해가 되는 행동 패턴
- 수면의 어려움
- 먹는 행위의 불안정
- 모든 행위에 무관심
- 모든 활동에 거부감
- 악몽
- 갑작스러운 화나 분노의 분출
이 모든 행동은 감정의 표현이다. 그런데 어른들의 눈에는 꼭 버릇없는 아이처럼, 배울 것을 못 배우고 있는 것처럼 생각 들게 만든다. 안전한 퇴행이고 정상적인 멈춤이라고 볼 수 있게 만드는 마음의 공간이 어른들에게도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겪는 감정, 슬픔이라는 단어는 꽤 아름답게 들리기도 한다.
'슬픔'이라는 단어는 화나 분노라는 단어보다는 꽤나 서정적이며 심지어 평화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슬픔이라는 감정은 쉬운 감정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느끼는 그 슬픔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강렬한 고통이다. 그 고통의 표현은 거칠고 날카롭기도 하다. 고통의 크기가 작지 않다. 애도의 슬픔은 사람을 미치게 할 만큼의 고통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물며 어른도 그러할진대, 마음 근육의 크기를 다 키우지 못한 아이들은 어떨까. '상실'이라는 단어의 무게. 과연, 그 누가 이 단어의 무게를 쉬이 이겨낼 수 있을까.
[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던 삶에서 남겨진 나.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 나의 삶도 더 이상 이전의 삶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뒤의 그 상실감은 우리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꿔버린다.
' 그 사람이 없이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
' 내가 즐기던 것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 내가 즐기던 것을 즐겨도 되는 것인가'
' 내가 살던 대로 살아도 되는 것인가'
' 나는 그래도 되는 것인가'
'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가'
' 정말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정말... 정말.....'
이 모든 감정의 과정을 설명해주고, 이해해주는 이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두려움인가.
아이들은 이별과 상실에 대해 설명하고 표현할 어휘가 없다. 말로 표현되지 않을 때의 답답함과 괴로움. 알지 못하는 것을 마주할 대의 두려움. 이 모든 불편함을 어린 나이에 겪는 것이다.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그 고통이 아이에게 다가올 때는 아이의 온몸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설명할 수 없기에, 설명되지 않기에, 몸으로 하는 것이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 알아차려지지 않은 감정은 고스란히 아이의 몸에 남아있다.
그 불편함이 어딘가로 녹아들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사실이다. 공기처럼 날아가 버려주길 기대하지만, 절망적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이 바로 감정의 존재감이다. 다만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보기 불편한 행동들을 보면서 그것이 감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덜 성숙한 발달의 단계를 겪는 중이라고 가볍게 넘겨버린다. 혹은, 알아차리고 싶어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삶의 모습을 그저 알지 못한 채 뛰어놀기만 해 주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 경험하고 있다. 공간에 머무는 에너지의 무게와 분위기를 모두 알아차리고 있다. 어른들이 겪는 그 어려운 감정을 아이들은 모두 감지해 낸다. 거울 뉴런은 언제나 열심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림자를 인정해야 한다.
어른들에게만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아니다. 아이들에게도 늘 따라다니는 그림자. 그 그림자를 못 본 척하면 그 그림자가 빛을 가로질러 몸 앞으로 나서는 날들이 오기도 한다. 암흑 같은 감정에 휩싸이는 수많은 날들을 홀로 헤매게 되는 그런 날도 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림자를 인정하면 우리 앞의 빛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내 뒤의 그림자를 확인해야 내 앞의 빛도 주시할 수 있다. 내 앞의 빛만 보면서 뒤를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현실성 떨어지는 사탕발림 긍정이 되기도 한다. 진짜 달콤함, 진짜 안식은 쓴 맛과 두려움을 진짜로 느껴야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림자가 있지만 우리 앞의 빛을 보며 길을 찾아 계속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림자, 빛, 그리고 길을 계속 걷기, 그 과정에 어른과 '함께' 걷는다는 것을 꼭 경험하게 해주어야 한다. 모두에게 똑같은 삶이며 홀로 걷게 두지 않겠다는 안심을 어른들에게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모른 척 넘어가려는 어른들, 아닌 척 지나치는 어른들, 숨기고 나아가려는 어른들의 마음을 헤아려 매달리기를 그만두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은 큰 빚을 지고 있다.
어른들의 마음을 그대로, 아이에게 말로써 표현하고 아이와 함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감정 표현의 모양과 수위를 조절하는 것일 뿐, 있는 감정을 없는 듯, 없는 감정을 있는 듯 조절해선 안된다. 어른들이 감정을 표현할 때, 아이들은 그제야 안심하기도 한다. 이제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도 되는구나, 생각해보게 된다. 자기 안의 그 어려운 감정을 몸 안에 가두지 않고 몸 밖의 공간으로 안전하게 내어놓을 수 있게 된다.
"민수야, 엄마도 마음이 슬퍼. 아빠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민수가 아빠를 보고 싶어 할 때, 엄마도 아빠가 보고 싶을 거야. 매일 보고 싶을까 봐 엄마도 벌써 슬퍼져. 우리 민수도 그렇겠지?"
한 번 두 번, 아이에게 엄마의 진짜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이 마음을 버리고 가야 할 곳(밝은 곳)으로 서둘러 가서는 안된다. 지금 이 감정, 이 감정에 그대로 충분히 있으면서 슬퍼하고, 화내면서 지금의 이 감정을 충분히 소화시켜야 한다 (안전을 늘 염두에 두면서). 그러면 어느 날, 아이는 똑같은 방식으로 엄마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치유의 첫 단계를 행동해낼 수 있게 된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두 사람이 함께 치유와 성장으로 나아가는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