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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만나는 당신의 마음

사례를 통해 이해해보는 그림책을 활용한 심리상담

여는 글


거둠의 계절, 가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 10월입니다. 어느 때보다 짧게 느껴지는 절기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분주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마음정원사가 가꾸는 텃밭에는 고구마니 무우니 하는 각종 먹거리들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어요. 여러분의 마음 밭에서는 일 년동안 어떤 열매들이 자라났는지 궁금합니다.


마음정원사는 청소년상담을 하면서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유인즉, 나이와 학년을 막론하고 어떤 아이들은 발화량과 자기표현 능력이 충분한 반면 그렇지 못한 청소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 얼마든지 대화를 통한 상담적 개입과 통찰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후자의 사례라면 내담자로 오는 친구들이나 상담사인 저나 상담 장면에서 고전하기 마련이에요.

위와 같은 이유로 평소에도 이런저런 도구나 매체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연구도 해보곤 합니다.


여러 매체(도구)가 있지만, 최근 가장 흥미를 두고 있는 것은 그림책입니다.

독서를 즐겨하면서도 그림책이란 분야는 꽤나 생소하다 여기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다양한 그림책을 접했는데,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작품들을 읽었을 때 만큼이나 강한 정서적 울림을 받아 놀랐습니다. 많이 웃고 울게 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내면의 자리에도 그 울림이 뻗어나가는 것을 경험했답니다.

상담 장면에서 ‘감각적 자원을 활용한 자기self 접촉’을 중요시 여기는 저에게 그림책은 훌륭한 또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겠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꽤나 풍부한 감각적 자극을 주는 ’독서‘라는 행위와 ’그림책‘이 만났을 때의 시너지란!


처음의 느낌이 강렬했기에 한동안은 수시로 저의 자기self를 대상으로 하여 시도해보았습니다.

함께 일하는 상담자들과도 더불어 같은 책을 읽고 느낌을 나눠보기도 했고요.

더러 함께 음미하는 시간이 쌓여가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관계가 친밀해지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답니다.



청소년 상담에의 적용 사례


어린 시절 책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 경험 한 번쯤은 있으시지요?


그도 모자라 꿈에서도 상상하면서 잠들었던 동화책의 주인공이 되거나 작가가 되어 새로운 장면을 그려보기도 하고 말입니다.


최근 독서치료의 일환으로 상담장면에서 그림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보고 있습니다. 

제가 만나는 아이들의 연령대가 초등부터 중고등까지 다양한데요. 동심이 살아있는 청소년 친구들이 그림책을 통해 자기self를 만나는 경험은 성인인 제 것과는 사뭇 다른가봅니다. 자기self를 그림책에 투영시키면서 등장인물 혹은 이야기와 동일시하는 것은 물론이고,책이 자신의 삶에 던지는 메세지들을 다양하게 건져올리더군요. 


개인적인 경험도 그렇고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게 이해하는데 수월하기에, 이번 포스팅에서는 마음정원사가 만나는 실제 청소년 내담자의 사례도 함께 소개하겠습니다.

내담자의 개인정보는 각색되어 있으며 사례 활용에 대해 본인에게 사전에 허락 받았습니다. 


(…)으로  표기한 부분은 상담자의 개입 혹은 중략을 의미합니다.




내담자 특징


- 이름: 별 (10대 / 여학생)

- 정서 : 심리검사상 우울, 불안 척도 상승

- 행동 : 자해 

- 인지 : 자살 사고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나를 더 많이 미워하면 오히려 제가 좋아하는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림도 잘 못그리는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에요”

- 자기개념: 자기 비난, 자기처벌적 태도 

 “저는 제 자신이 미워요. 할 줄 아는 것도 딱히 없고. 그렇다고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별이는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부모님에 의해 상담에 의뢰되었습니다.

발화량이 많지 않고 눈맞춤도 드물게 이뤄졌어요. 상담자가 던지는 질문에 돌아오는 답변도 간결하여 전반적으로 위축-경직되어있다는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던 별이. 단기 상담 셋팅이니만큼 초반에 호소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했기에 실시한 검사에서 우울과 불안이 상승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위기 사례임을 감안하여 매주 자살-자해 충동과 이에 대한 별이 나름의 대처 방법을 물어오고 있던 과정에서, 아이의 표면적 욕구(want)가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그림을 잘 그려서 내 그림이 팔렸으면 좋겠다]라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표면적 욕구의 뒷면에는 [좌절] 포인트가 놓여있을텐데요. 별이가 말한 ‘그림을 잘 그려서 팔고 싶다’는 마음은 과연 [자존감 혹은 자기개념]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을지 고민하며 이리저리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평소 대화를 통해 자기 표현을 해본 경험이 많지 않은 탓인지 언어 상담으로는 한계가 느껴져 아쉬워하던 중 문득 그림책이 떠올랐습니다.  책과 그림을 좋아하는 별이의 관심사에 적합할 수 있겠다는 작은 기대감으로 그림책을 권했고 아이는 처음에는 시큰둥하더니 이내 그림책으로 자신의 삶을 꺼내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상담 장면에서 별이와 그림책으로 풀어간 이야기들의 일부입니다.  




그림책과 함께한 상담



#1. 우산을 쓰지 않는 시란씨 

[저자: 다나카와 슌타로, 국제엠네스티 | 그림: 이세 히데코 | 옮김: 김황 | 출판사: 천개의 바람] 



처음 그림책을 제안했을 때 별이는 여러권의 그림책 중에서 ‘우산을 쓰지 않은 시란씨’를 골랐습니다.

빠른 속도로 단숨에 읽어내더니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하더군요.


"누군가 제 마음을 좀 알아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현실에선.. 누구도 내 마음을 몰라주니까. 사실 그래서 쉬쉬하게 되는 것도 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이 장면의 분위기나 주인공의 상태가 저랑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아! 드디어 우리 별이가 입을 열어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되는 순간, 어찌나 마음이 기쁘던지요.

그림책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는 느낌에 옅은 안도감도 올라오면서 곧 바로 아이가 감정에 접촉하고, 표현해볼 수 있도록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이 때는 감정카드를 도구로 사용했어요.



[감정카드 이미지 출처 - 마음정원사의 뜰 | 무단도용 금지]


별이의 마음이 조금은 더 선명하게 그려지기에 곧바로 감정카드와 그림책을 통합하는 작업으로 마음 속 풍경을 그려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도화지와 색연필이 아닌 마음에 띄워보는 풍경인셈이지요.


"겨울 밤 눈이 잔뜩 쌓여있는데 하늘은 어둡고.. 풍경 속의 여러 색깔 중에서 하나만 퀴퀴한 느낌이에요. 저 혼자만 그런 색처럼. 그런 느낌. 풍경 속에서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러니까 보잘 것 없고 쓸모 없는 존재인거죠"


상담사의 어떤 질문에도 그다지 반응않던 별이는 자기 자신을 그림책과 감정카드로 이렇게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아이의 마음 속에서 이런 풍경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겁니다. 저도 별이의 이야기를 따라 순식간에 춥고 어두운 쓸쓸한 풍경 속으로 빨려들어간 듯 가슴 한 곳이 찌릿 아파오더군요. 


그림책과의 첫 만남을 묻자 ‘이런 방법으로도 내 마음을 알 수 있구나 싶어서 신선했어요’하고 답하며 앞으로도 그림책을 사용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별이는 다른 책들과 함께  [고독하고 초라한 나]의 또 다른 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은 있다. 

[저자: 브래들리 트레버 그리브 | 옮김: 신현림 | 출판사: 바다출판사] 



우울 점수가 상승한 아이가 이 책을 고른 것은 우연이었을까요?

단정지어 말하긴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별이가 고른 책은, 우울한 날들에 대한 이야기와 꼭 들어맞는 듯한 동물 사진을 찍어 엮은 책이에요.

본 회기에서 아이는 자신의 우울한 마음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속의 동물을 보니까 겉으로는 멀쩡한데 속은 그렇지 않은 모습이 공감됐어요.  (...) 신기해요. (동물이)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언젠가는 행복해지겠지..라는 희망을 붙잡고 있는거 같아요. (…) 사는거 자체가 갉아먹히는것 같고 행복하지 않은 시간이 길어져서. (…) 예전에는 그림이 잘 안그려져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관대함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그린 그림들을 폐기중이에요. (…) 그림을 통해서 삶에 대한 제 생각을 전하고 싶어요. 그래서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뭔가 깨달음을 줄 수 있는. 많은 사람이 아니어도, 단 몇 사람이라도 더 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그림있잖아요. 그런걸 그리고 싶어요. (…) 요즘의 제 생각이라면, 우울한 날이 어떤지에 대해서 표현하고 싶죠."




#3.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글&그림: 쉘 실버스타인 | 옮김: 이재명 | 출판사: 시공주니어]




별이는 지난 회기에서 관심을 보였던 책을 선택해서 읽어내려갔어요.

여전히 자해와 자살사고가 진행 중이었지만 지나치게 경직되어있다는 느낌이 거의 옅어지고 웃기도 하고 말이지요. 상담의 앞부분에서는 위기도 체크를 하면서 인지치료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이분법적인 사고와 딱딱하게 굳어있는 듯한 생각의 흐름에 논박도 하면서 제법 흐름을 타고 있다는 신호가 잡히기도 했어요. 상담 중 특정 시점에 이르면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짝을 찾았다고 끝이 아니구나. 그림을 완성시키는거 말고도 그려가는 과정을 즐겨봐야겠다. 그런 생각이요."


감정목록에서는 [감격스럽다], [허탈하다]를 꼽았어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 감격스럽다

"길을 찾은 것 같아요. 내가 나아갈 행선지를 찾은 듯한. 결과보다 과정에 중심을 두면서.. 더 나를 위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 행선지는 앞으로 나아갈 삶?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의 삶이요. 결과가 아닌 나를 소중하게 대하는 그림작가로서의 삶."


- 허탈하다

"목표지향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가져온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면 여태껏 해온 노력이 허사이지 않나… 싶어져서 허탈하기도 해요."




소회



상담을 통해 확인했던 별이의 자해, 자살사고로 연결되는 사고 패턴은 아주 냉정하고 엄격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전시회에 출품이라도 한 번은 해야 성공한 작가지.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그림을 못그리지? 어쩜 이렇게 무능력하고 재능도 없는걸까. 할 줄 아는게 하나도 없네. 재능이 없으면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하는데. 난 그렇지도 않잖아. 나 같은 인간은 벌 받아도 싸. 좋은 소리 들을 자격도 없지. 그냥 욕 좀 더 먹어야되. 난 이런 대접 받는게 당연한 인간이니까'


스스로를 가혹하게, 때로는 잔인하게 절벽 끝으로 몰고가는 인지적인 패턴이 보이시나요? 

충동성이 높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10대 청소년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발달 단계상 특징이긴 하나 별이가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가혹합니다. 이처럼 날카로운 송곳 같은 생각들로 자신을 찌르다 못해 결국 자해와 자살 사고로 이어진 것이 아닐지요. 

지금껏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던 별이는 상담과 그림책으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이의 입에서 ‘나를 소중하게 여길 필요가 있겠다’하는 이야기가 자발적으로 나온 순간.

꺼져가는 마음의 불씨를 다시 살려내고 싶은 한 명의 상담사이자 아이들이 신나게 꿈꿀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은 한 명의 어른으로서 눈물나게 고마웠습니다. 


아이의 우울과 불안을 이루고 있는 수 많은 조각들 중에 작은 조각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림책은 훌륭한 지도의 역할을 해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림책이라는 낯선 지도를 꼭 쥐고, 새로운 길을 걷기로 결심한 우리 별이의 용기야 말로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자원이라 믿습니다. 




닫는 글



지금도 별이와의 만남은 이어지고 있어요.

천천히 안전하게 별이의 마음에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그림책의 활용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사례의 일부만 가져오느라 별이의 마음이 금새 나아지고 회복되는 것 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상담도 인생이란 과정의 일부이기에, 별이도 다른 친구들도 상담을 하면서 아팠다가 조금 나아지고, 

더 크게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연습하는 중입니다. 


삶이 늘 그렇듯 맑은 날, 흐린 날, 천둥번개 치며 요란한 날들이 지나갑니다. 

별이 뿐만 아니라 성인 내담자분들도 ‘언제나 행복한, 전혀 슬프지 않고, 항상 괜찮은 내‘가 되어야 상담이 완성되고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시는 일이 더러 있더군요.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도 저의 부족한 글솜씨에 그렇게 이해하시면 어쩌나 노파심이 나 말이 길어지네요.


상점에 노랗게 익어가는 귤이 등장하는걸 보니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나봅니다. 가을을 지나는 마음정원사의 뜰에는 그림책이 쌓여가네요. 늘어가는 책의 수만큼, 제 마음과 닿아있는 아이들의 마음도 영글어 가는 것 같아요. 연말에는 여러분의 마음을 만날 수 있는 인생 그림책을 한 번 찾아보시는건 어떨까요?

귤과 고구마 그리고 따뜻한 차 한 잔와 함께 말이에요.




마음과 마음 사이에 사다리를 짓는 

마음정원사가 썼습니다.

(각색한 글이지만 한 사람의 소중한 삶을 담은 글이기에 사례 및 사진 사용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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