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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지나가는 자리

여백이 있어 안전한 삶

아버지로부터 바람에게 길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도심 속을 나란히 걸을 때면 펄럭이는 현수막을 가르켜 ‘바람이 드나드는 길을 만들어줘야해. 그래야 저것들이 찢어지거나 떨어지지 않아.’ 하고 옥외간판 전문가의 지식을 전해주셨지요.


무슨 말인가 하고 가르키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길다란 현수막에 양끝이나 중간즈음에 동그란 구멍이 몇 군데 뚫려 있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깔끔하게 잘려나간 원의 가장자리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둔 일종의 장치임을 나타내는 듯 했는데, 실제로 여름마다 태풍이 지나가도 훼손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들은 구멍난 현수막이었습니다.


언젠가 둘이서 제법 큰 돌탑을 감상할 일이 있었어요.


‘살펴보면 군데 군데 틈이 나 있는데, 왜 그런 것 같으냐’하는 질문으로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빈 틈’의 필요성. 답을 기대하는 물음이 아닌 본인의 마음을 되돌아 보시며 지긋이 던지시는 말씀이었을겁니다.


크고 작은 돌들을 쌓아올린 돌탑이든,  커다란 바위 하나 깎아 만든 탑이든 듬성듬성 보이는 비어있는 틈은 바람이 지나가는 길이랍니다. 어떤 궂은 날에도 비바람 흘려보내고 자리를 단단히 지키라는 의도가 담겨있는 지혜의 여백인 셈이지요.


현수막과 돌탑을 핑계로 한 번 씩 ‘바람길’을 언급하시는 아버지는, 자신의 지난한 세월 허리춤에 나 있는 ‘빈 틈’을 돌아보시며 숨을 고르셨던게 아닐런지. 수다스러운 부녀는 질문과 침묵으로 버무려진 대화를 곧잘 즐기곤 했습니다.


한 번은 제주에 갈 일이 있어 혼자 돌담길을 따라 걸었답니다.


그곳에는 일찌감치 바람과 어우러져 사는 법을 터득한 이들의 슬기가 돌담에 녹아있었어요. 마음에 가만히 그려본 담 쌓는 풍경. 돌 하나 씩 손에 들고 이리저리 끼워맞추는 것 만으로도 꽤나 여럿의 품이 들었을 것 같더군요.


담 너머 보금자리 잘 지켜 주마고 소원하며 구멍을 남겨두었던 것일까요? 뻣뻣한 시멘트나 진흙으로 꽉 채웠다면 얼마 못 가 금이 가거나 무너졌을거란 생각이 들자 ‘바람에 맞서지만 말고 적당히 흘려보내야한다’던 아버지의 말씀이 눈 앞의 돌담에서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꼼짝 않고 버텨서 이기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강인함과 거리가 있지 싶어요. 적당한 흔들림, 틈 그리고 여유가 조화를 이룰 때 부드러운 힘을 자아내는 것이겠지요.


바람에게 길을 내어줌으로써 성긴 삶을 산다는 건,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이 꽉 들어 찬 그것 보다 유연하지 싶습니다.


여러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음의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어느 정도 빠르게 흐르는 강물에 손목까지 담그고 다섯 손가락 모두 바짝 모은 상태로 물을 젓는 것과 쫙 펼쳐 이리저리 움직였을 때 어느 쪽이 더 자유로울 것 같은가요? 전자가 저항이 큰 탓에 유연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걸 예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자연스러운 삶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필자는 우리네 가슴에 바람의 나들목이 많이 놓여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가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는 여유가 자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23년 10월,

차가워진 가을바람을 느끼며

마음정원사가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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