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P 특징 #2> 내 마음대로 끌 수 없는 고감도 센서
저는 시끌벅적한 공간이나, 모임에만 다녀오면 완전히 뻗어버립니다. 분명 사람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냈고 불편한 자리도 아니었는데, 그 공간에서 저만 유독 에너지 소모가 빠른 느낌이랄까요.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 말투, 기분 같은 것들이 알아서 감지되는데, 그 센서를 끄고 싶어도 마음대로 끌 수 없으니 똑같이 100%로 시작해도 저만 체력이 빨리 닳는 느낌이에요. 좋아하는 운동은 몇 시간씩 할 정도로 체력이 나쁜 편도 아닌데, 정신적 체력은 유독 약합니다. 오감도 예민해서, 정신없는 곳이나 만원 버스, 지하철이나 백화점처럼 사람이 많거나 밀폐된 공간 환경을 힘들어해요. 그래서 주변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짧게라도 혼자만의 충전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예민한 기질의 사람이라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본 적 있으실 거예요.
지난 글에서 예민한 사람은 모든 정보를 깊게 처리하느라 생각이 많다는 이야기를 했었죠. 신경회로의 과민함으로 인해 생각만 많은 게 아니라, 남들보다 모든 자극을 더 섬세하게 느끼고, 그래서 신경계의 과부하가 금방 발생한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쉽게 말해, 성능은 좋지만 그만큼 에너지 연비가 떨어지는 사람들이에요. 고성능 블랙박스를 상시녹화 모드로 켜두면 금방 방전이 되어버리듯, 예민한 사람들은 번아웃되기가 쉽습니다.
남들이 한 가지 생각을 할 때 더 많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고, 동시에 여러 가지를 신경 쓸 수 있어 멀티태스킹 능력도 좋지만, 그만큼 에너지 소모가 심해서 금방 지쳐버려요. 이 특성을 잘만 사용한다면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걸 해낼 수도 있지만, 정신적 피로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우울, 번아웃을 달고 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쉽습니다. 특히 장기간의 스트레스 상황, 짧은 시간에 많은 걸 해내야 하거나 동시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지게 됐을 때는 마음의 과부하로 불안, 공황발작, 두통, 불면과 같은 형태로 마음이 고장이 나버리는 사람도 많아요.
그리고 정신적으로 빨리 지치기 때문에 감정의 기복을 조절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예민한 사람이든, 둔감한 사람이든, 누구나 마음이 지쳤을 때는 사소한 일로도 쉽게 짜증이 나거나 감정적으로 예민해질 수 있어요. 이건 기질과 상관없이 '스트레스'의 작용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민한 사람들은 안 그래도 감정이 풍부하고 섬세한데 남들보다 정신적 피로도 쉽게 쌓이니, 스트레스 관리도 어렵고, 감정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도 남들보다 어려운 거예요. 삶의 난이도가 더 높다고 느껴지는 건 이것 때문이기도 합니다.
깊게 처리하는 신경회로의 특성은 물리적인 자극에도 적용됩니다.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민감도는 사람마다 기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100의 자극도 누구는 200으로, 누구는 50으로 느낄 수도 있어요. 어느 감각이 예민한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예민한 사람들은 대체로 빛, 소리, 냄새, 맛, 촉감을 강하게 느낍니다.
오감이 발달한 만큼 시끄러운 소음, 기분 나쁜 촉감, 싫어하는 맛이나 냄새, 지나치게 밝은 빛과 같은 불쾌한 자극들에 더 빨리 지쳐버립니다. 사람이 많고 답답한 곳을 힘들어하는 것도 민감한 감각 때문이죠. 대신 반대로, 편안한 음악, 부드러운 촉감, 좋아하는 음식과 기분 좋은 향기, 자연에서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도 남들보다 크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 환경을 만드는 게 특히 중요합니다.
이러한 특성들 때문에 예민한 사람 중에는 스스로를 마음이 나약하다거나, 감정 조절도 못하는 한심한 놈이라 비난하며 살아온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남들보다 정신적으로 빨리 지치는 것도, 감정 조절의 난이도가 어려운 것도 내 잘못이 아닙니다. 의지가 약했거나, 노력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에요. 그저 타고난 기질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바뀌려 할 필요도 없고, 자신을 비난하지도 말아주세요.
대신 나의 한계점과 장점을 분명히 파악해 그것에 맞는 삶의 요령을 만들어 주세요. 예를 들자면, 남들이 50분 집중하고 10분 쉴 때, 25분 집중하고 5분 쉬는 식으로 계획을 짠다거나, 여행 일정 중에도 반드시 쉬는 시간을 포함시키고, 사람 많은 공간을 되도록 피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오감이 예민하니 집중해야 할 때는 칸막이로 불편한 시야를 차단하거나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는 것도 좋고, 쉴 때도 디퓨저나 편안한 ASMR을 통해 휴식의 강도를 높일 수도 있겠죠.
예민한 사람을 위한 삶의 요령들은 추후에 따로 자세히 설명드릴 예정이고, 다음 이어지는 글에서는 예민한 사람들의 '공감 능력과 감정 동화' 특성에 대해서도 정리해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