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꼰대"와 "좆소"가 키웠다

부당함 속에서도, 누군가는 자라났다

by 잡생각 수집가

비유가 아니다.

정말 회사 안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2008년, 내가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 이야기다.

사무실 구석엔 커피잔 대신 잿더리로 쓰는 종이컵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로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WAF 로그와 패킷 덤프가 나의 교재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남아서 공부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 있다.
“일 없으면 공부라도 하고 가.”

그 말, 지금 생각하면… 은근 시킨 거였던 것 같다.

선배가 툭 던진 그 말은 지금 기준으론 가스라이팅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땐, 그 말이 마치 ‘프로의 자세’처럼 들렸다.

회사생활이란 원래 군대처럼 어려운 거라 믿었고, 나는 그냥 그 믿음대로 살았다.



요즘은 웃기게 들릴 만한 풍경들도 있었다.

월요일 아침엔 30분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을 청소해야 했다.

회식이 끝나면 막내들이 노래방에서 트로트를 불렀다.

꼭 재롱잔치처럼 말이다.

나는 그 당시 유행했던 트로트를 불렀고, 그 와중에 선배에게 끌려나가 혼났다.

“야, 어디 주머니에 손 넣고 노래하냐?”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이없는 장면이다.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날은, 6일 연속 야근을 한 주의 마지막 날이었다.

피로가 극에 달해 몸이 축 처져 있던 그날, 회사차를 몰고 외근을 나가던 중 주차장 기둥을 그만 긁고 말았다.

회사는 내게 수리비 절반을 부담하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게 회사라는 곳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스펙도 부족했고, 학벌도 남들보다 떨어졌다.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큰 야망도 없었다. 그냥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하며, 하루하루 버티던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건, 당시의 회사 문화 덕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환경에 어쩔 수 없이 길들여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후 몇 번의 이직을 거쳐, 지금은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회사에서 보안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실력보다 운이 좋았고, 의지보단 환경이 날 끌고 갔다.

가진 것에 비하면, 어쩌면 과분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대단한 경력도, 스펙도 아니었지만, 그때 억지로라도 붙잡고 배운 시간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요즘 시대엔 그런 환경이 거의 없다.

누군가 퇴근 후 남아 있으면, 오히려 의심을 받는다.

누가 회식에서 억지로 노래를 시키면, 바로 인스타에 올라간다.

미디어 속에서는 부당한 요구에 사이다처럼 반항하는 장면이 반복된다.

상사에게 “그건 제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캐릭터가 멋져 보인다.

그리고 나도 이제는 그게 맞고, 그래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지금 시대였다면, 나는 성장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나.

나는 게으르고,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시작하기보다, 누군가 끌어줘야 움직이는 부류였다.

그때의 회사는 그런 사람조차도 억지로 붙잡고, 어떻게든 굴러가게 만들었다.

그게 착취였는지는 몰라도, 이상하게도 그 안엔 성장의 기회가 숨어 있었다.


꼰대 문화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절,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진심은,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거다.
하지만, 적어도 나 같은 사람에겐
지금 이 시대가 오히려
성장의 기회를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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