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만 기울지 않기 위해 AI를 꺼내 들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사형제 찬성자였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죽음조차 그 죗값에 모자랄 수 있다고 여겼다.
사람을 해친 자에게 돌아오는 응보적 정의, 그것이야말로 질서를 지키는 최소한의 방패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생각은 단지 사형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원래 "형벌은 강해야 한다"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강력한 처벌이 곧 강력한 사회를 만든다고 믿었고, 사회가 약해지는 건 처벌이 약해서라고 생각했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죽음조차 그 죗값에 모자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유튜브 영상을 봤다. 정확히 어떤 영상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뚜렷하게 남아 있다. 형벌이 지나치게 엄격해질 경우, 범죄자는 형량 차이에 무감각해지고 오히려 더 큰 범죄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였다. 예컨대, 누군가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든 죽여버리든 결과적으로 종신형 혹은 30년 이상의 형을 받는다면, 범죄자는 차라리 죽이고 도망가는 편이 '합리적'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형벌의 세기'가 반드시 사회 안전과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의는 강도가 아니라 균형일 수도 있겠구나. 형벌은 감정이 아니라 설계의 문제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영상 하나로,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강한 처벌 = 강한 사회"라는 생각을 멈추고 질문을 시작했다.
이건 나에게 의미 있는 전환점이었다. 누군가와의 논쟁이나 뉴스 댓글이 아닌, 차분한 논리를 담은 설명 하나가 내 사고의 틀을 흔들었으니까.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나도 내 생각이 바뀔 수 있구나. 아니, 바뀌기보다는 넓어질 수 있구나.
나는 갈라치기가 심한 요즘 사회에서, 일부러라도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게 어떤 때는 인위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가 똑똑해 보이고 싶어하는 허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녀, 좌우, 진보와 보수 같은 구도에서 늘 내 쪽이 옳다고 주장하는 소리들이 너무 커질수록, 나는 상대편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는 게 최소한의 균형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보고 싶었다. 나는 이전에 '엄벌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룬 설명을 통해, 과도한 형벌이 사회에 미치는 역효과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는 '강한 처벌이 곧 정의'라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 경험은 내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사형제 폐지'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처럼 느껴졌다. 사형은 단순히 형량의 세기가 아닌, '국가가 생명을 거두는 선택'이라는 가장 극단적이고 비가역적인 권한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형제를 단순한 형벌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공동체가 어떤 범죄를 용납하지 않는지를 선언하는 일종의 윤리적 경계선이며, 피해자의 생명이 단절된 만큼 가해자 역시 그 책임에서 도피할 수 없다는 사회적 메시지라고 믿었다.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사형제를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반대 주장은 감정적이거나 이상주의적으로 느껴져 좀처럼 설득되지 않았다.
기사에서도, 댓글에서도, TV 프로그램에서도 반대 주장을 많이 접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감정에 기댄 논리들이 많았고, 오히려 그런 주장들은 내 입장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감정은 사람을 흔들 수는 있어도, 내 생각을 설득하진 못했다. 그래서 이번엔 차라리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설명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ChatGPT에게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사형은 되돌릴 수 없는 제도이며,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사형은 '판단의 정당성'이 아니라, '판단의 불완전함'에 근거해 재고돼야 한다.
이건 나에게 꽤 어려운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사형제는 오직 명백한 악에만 적용되는 줄 알았고,
오판의 가능성은 수사나 재판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지 않았을 때의 문제라고 여겨왔다. 다시 말해,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실행상의 오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음’이라는 구조적 특성 앞에서는 그 ‘예외’조차 너무 크다는 말이 납득됐다.
사형제는 정의라기보다는, 때로는 분노의 배출구 역할을 한다.
그 분노가 정의와 혼동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마녀사냥과 제도의 구분을 잃을 수도 있다.
이 부분은 특히 인상 깊었다.
분노는 정의의 에너지원일 수 있지만, 그 감정에 기댄 제도는 쉽게 흑백 논리로 흐를 수 있다.
누가 봐도 괴물 같은 사람에게 내리는 판결이라고 믿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가 ‘확실하다’고 느낀 감정들조차, 어쩌면 마녀사냥의 일부일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전히 사형제에 찬성하는 편이다. 극단적 상황에서는 필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GPT와의 대화는 내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했다. “내가 찬성하는 그 사형제, 진짜 괴물에게만 적용될까?”
나는 여전히 완전히 설득되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최소한 내가 한쪽 감정에만 기대어 사고하고 있지는 않은지, 멈춰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나를 설득한 건 단순한 논쟁도, 누군가의 댓글도 아니었다.
‘이건 어때요?’ 하고 조용히 던지는 질문들이었다.
그게 바로 지금, AI 시대에 내가 가장 기대하는 기능이다.
내 생각을 더 단단하게 만들거나, 더 부드럽게 넓혀주는 도구.
GPT와의 대화는 이번에도 내 생각을 바꾸진 않았다.
그렇지만 내 생각을 조금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