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실패라 부르지 않는 사회

실패를 가르치지 않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by 잡생각 수집가

초등학교 시절, 반에서 ‘인기투표’라는 걸 했다.
1등부터 5등까지만 이름이 불리고, 그 아래는 모두 0표였다.
나는 그 0표 중 하나였다.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미움은 아니었다. 그냥… 존재감이 없었던 거다.


그 어린 나이에 받은 ‘무표’는 쪽팔림이라는 감정으로 기억됐고,
나는 그 이후로 반 친구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웃길 수 있을까, 말실수는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그때부터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꾸 돌아보게 됐다.

그게 나에겐 나름의 ‘메타인지’였다.

쪽팔림은 내가 성장하게 만든 자극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성적은 반에서 중하위권.
담임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인문계보다는 실업계가 어울릴 수도 있겠다.”
그 시절, 실업계는 낙인처럼 여겨졌다.
‘문제아’나 ‘낙오자’가 간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우겼다. 인문계로 갈 거라고.
운 좋게 진학은 됐지만, 불안은 커졌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끝일지도 몰라.’
그 위기의식은 나를 진짜로 움직이게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공부했다.
학원을 다니고, 계획표를 만들고,
심지어 내 손으로 시험지를 만들기도 했다.
결과는 평균 90점. 그때만큼 열심히 산 적은, 지금도 드물다.
그때 나는 알게 됐다.

실패는 무섭지만, 실패를 피하려는 욕망이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는 걸.


그렇게 쪽팔림과 실패를 통해, 나는 조금씩 나를 만들어갔다.




요즘은 좀 다른 것 같다.

얼마 전 상식 퀴즈를 같이 풀던 자리에서 누군가 쉬운 문제를 틀렸다.
예전 같았으면 웃음이 터졌을 상황인데,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건 모를 수도 있지. 그걸로 사람 평가하지 마.”
당당한 말이었다. 틀린 사람이 아닌, 웃는 사람이 눈총을 받았다.

그 말에 공감도 되지만, 어딘가 묘하게 불편한 감정이 남았다.


비슷한 시기, 어떤 학교에서 있었던 사건도 떠오른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외모로 친구를 평가하면 안 된다”고 조용히 주의를 줬는데,
그걸 들은 학부모가 학교에 항의했다고 한다.
“왜 우리 애 기를 꺾으세요. 그건 애가 당당하게 표현한 건데요.”

요즘은 틀린 걸 틀렸다고 말하는 순간, 누군가의 기를 죽이는 사람이 된다.

실패를 ‘실패’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금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아이를 감싸는 부모의 마음은 이해한다.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면,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은, 그 감싸는 마음이 때로는 너무 완벽하다.


아이의 실수를 실수라 부르지 못하게 만들고,
이기적인 태도를 “자기주장이 강한 거예요”라고 포장한다.

남보다 느린 걸 “특별한 거예요”라고 바꾸고,
실패를 회복해야 할 과정이 아니라 회피해야 할 낙인처럼 다룬다.


그 결과, 실패가 사라졌다.


아니, 실패를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실패는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고, 모두가 ‘정답인 상태’로 남는다.

나는 나의 쪽팔림을 거울처럼 삼아 살아왔다.
실패의 기억은 나를 움츠리게도 했지만,
그것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요즘 아이들은 쪽팔릴 일이 없다.
틀려도 지적받지 않고,
잘못된 말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보호막 속에서 스쳐 지나간다.


좋은 시대일까?


실패 없이 자란 아이는,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실패를 모른 채 자란 아이는, 나중에 무너졌을 때 어떻게 다시 일어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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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호’라고 믿는 것들이,
어쩌면 그들에게서 회복의 힘을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그게… 그냥 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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