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회사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지난번 글에서 나는 "꼰대와 좆소가 나를 키웠다"고 썼다.
억지로 남겨두고, 억지로 시켜서라도 어떻게든 굴러가게 만들던 회사 문화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배웠다.
그게 착취였는지, 기회였는지 아직도 판단이 어렵지만… 분명한 건,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사실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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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번엔, 그 ‘좆소와 중소’ 속에서 내가 실제로 어떻게 커리어를 이어왔는지 얘기해보려 한다.
솔직히 조심스럽다.
왜냐면, 누군가에게는 희망처럼 들릴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지옥을 정당화하는 말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라는 걸 전제로 말해보겠다.
“성공한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후에 포장되어 평범한 사람을 망친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성공한 인생’은 아니다.
다만, 평범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느낄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은 성공의 신화가 아니라, 그냥 한 명의 보통 직장인이 걸어온 길을 조금 길게 풀어내는 이야기다.
잡설이 길었다.
그만큼 이 이야기가 조심스러운 까닭이다.
그 시절이라고 해봤자, 내가 50대도 아니고, 고도성장기의 주인공도 아니다.
내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건 2008년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IMF 이후 가장 힘들다"는 식의 기사가 매일 나오던 때였다.
대기업 공채 경쟁률은 100대 1이 당연했고, 스펙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기였다.
토익 점수, 해외 연수 경험, 대외활동 같은 것들이 면접 자리에서 화폐처럼 쓰이던 시절.
당연히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는 시작부터 경쟁이 되지 않았다.
2008년, 첫 회사.
나는 전문대 졸업자였고, 자격증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력서에 내세울 게 없던 나는, 면접 자리에서 "열심히 하겠다"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 말 그대로의 회사에 들어갔다.
직원 수 10명 남짓. 사무실은 낡은 빌딩 5층,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회색 건물 외벽뿐이었다.
종이컵에 담배꽁초를 비비며 선배들이 잡담을 하는 사이, 나는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설치 CD와 두꺼운 매뉴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웹 보안 솔루션, 엔드포인트 보안 솔루션, NAC, 심지어 보안과 상관도 없는 네트워크 장비까지.
“야, 이거 매뉴얼 보고 오늘까지 설정해놔.” 그 한마디면 끝이었다.
누구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고, 질문하면 "공부 좀 하고 와"라는 답이 돌아왔다.
처음엔 막막했다.
낯선 CLI 화면 앞에서 손가락이 얼어붙었고, 로그는 마치 외계어처럼 보였다.
밤이 되면 사무실 불빛은 나 혼자만 켜져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싶다가도, 다시 매뉴얼을 펼쳤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는 시간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버티다 보니,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장비들이 말하는 게 들리기 시작했다.
로그에 찍힌 패턴이 눈에 들어왔고, 에러 메시지가 무슨 뜻인지 직감적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선배가 막히던 걸 내가 먼저 해결해줬을 때
— 처음으로 ‘에이스’라는 소리를 들었다.
내 초봉은 약 1600만 원. 그때도 대기업은 4000만 원을 줬다.
차이는 어마어마했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그렇게 절망하지 않았다.
왜냐면, 하루하루 새롭게 배우는 게 있었으니까.
좁은 사무실 한구석, 나는 누구보다 넓은 세상을 만지고 있었다.
두 번째 회사는 조금 달랐다.
여전히 중소 회사였지만, 이번엔 ‘벤더’, 즉 보안 솔루션을 만드는 회사였다.
전 회사에 비해 규모가 몇배 이상나는 기업이였다.
내가 다뤘던 수많은 제품중 1개의 제품 경쟁사였다.
그때 내가 합격 한 이유는 간단했다.
“쟤는 이것저것 다 만져봤다더라.” “타 회사 제품 쟤가 잘한다더라.” 좆소에서 잡다하게 굴려본 경험이, 여기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통했다.
입사 첫날, 나는 구석 책상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 두 대와 서버 한 대, 그리고 테스트용 보안 솔루션. 내 역할은 고객사에서 “이거 왜 안 돼요?”라고 물으면, 원인을 찾아내고 수정해주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더 힘들었다.
고객사마다 환경이 달라서, 어제 고친 게 오늘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과정에서 나는 ‘깊이’를 배웠다.
그전엔 단순히 장비를 연결하고 로그를 보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이 기능이 왜 필요한가, 보안적으로 어떤 원리를 막으려는 건가”를 고민해야 했다.
그 무렵 회사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클라우드 환경에서 돌아가는 보안 제품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테스터이자, 동시에 첫 고객사 대응자가 되었다.
AWS 콘솔에 익숙하지도 않았던 시절,
버벅이며 계정을 만들고, 보안 그룹을 세팅하고, 정책을 꼬리에 꼬리 물고 테스트했다.
실수하면 서버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고, 그럴 때마다 새벽까지 붙잡고 원인을 찾았다.
힘들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경험이 내 커리어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나중에 더 큰 회사로 옮길 때, 클라우드 보안 경험을 묻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할 수 있었다.
“저는 제품을 개발 단계에서부터 클라우드 환경에 올려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다른 지원자들과 나를 구분해 주었다.
야근은 여전히 잦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고객의 버그 리포트를 받아내는 순간, 제품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 직접 눈으로 보는 순간,
내가 단순히 ‘운영자’가 아니라 ‘제품을 성장시키는 사람’이라는 실감을 얻었다.
그리고 그게 내게 큰 자신감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또 다른 기회를 맞았다.
세 번째 회사. 여기서부터 나는 ‘보안 엔지니어’가 아니라 ‘회사 보안담당자’가 되었다. 즉, 솔루션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게 아니라, 회사 전체의 보안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여전히 중소로 구분되는 회사, 하지만 매출 규모도 커지고, 회사 건물도 삐까 번쩍 했다.
이번에 내가 합격한 이유도 분명했다.
회사에서 다루는 솔루션의 대부분을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이고, 클라우드의 경험이 있는 인재가 당시에 많지 않았다.
이직 후 처음엔 멋있어 보였다.
“이제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보안 담당자다.” 명함에 적힌 직함도, 주변의 시선도 달라졌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버거웠다.
솔루션 운영, 침해 대응, 모의해킹… 큰 회사였다면 여러 팀이 나눠 맡을 일을, 이곳에서는 내가 혼자 다 해야 했다.
클라우드 보안도 봐야 했고, 인프라 보안도 챙겨야 했다.
업무의 폭은 넓었지만, 손은 항상 모자랐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일이 몰려왔다.
보안 로그를 확인하다가, 중간에 외부 보안 점검 대응으로 끌려 나갔고, 다시 와서는 AWS S/G 정책을 수정해야 했다.
밤이 되면 피로가 몰려왔지만, 동시에 묘한 성취감이 있었다.
“내가 지금 큰 회사의 세 팀, 네 팀 몫을 하고 있구나.” 이직을 준비할 때, 이 경험은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이력서에 줄줄이 써 내려갔다.
모의해킹, 솔루션 운영, 침해 대응, 클라우드 보안, 인프라 보안…
사실상 작은 회사에서 ‘다 했던 일’들이, 큰 회사에선 ‘전문 경력’으로 인정됐다.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어느 보안 직군이든 지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누구나 이름을 들어본 회사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지금은 그곳에서 보안담당자로 일하고 있다.
뽑힌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내가 좆소에서, 중소에서 쌓아왔던 수많은 경험들을 이 회사의 언어로 다시 써냈기 때문이다.
과거의 포트폴리오를 뒤집어보니, 그 안에는 이미 이 회사가 원하던 스펙과 사례들이 숨어 있었다.
면접 자리에서, 작은 회사에서 피워 올린 수많은 흔적들이 큰 회사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을 보았다.
나는 그걸 꺼내 맞는 퍼즐 조각처럼 끼워 넣었을 뿐이다.
내가 특별히 뛰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작은 곳에서 버텼고, 그 버팀 속에서 경험이 쌓였고, 그 경험을 어떻게든 쓰임새 있게 보여주려 애썼을 뿐이다.
돌이켜 보면 그렇다.
좆소는 힘들었고, 중소는 버거웠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결국 내 기회의 창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누군가 “중소기업 가지 말라”는 말을 하면, 나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물론, 좆소나 중소에서 견디다 번아웃되는 사람도 많다.
착취만 남고, 성장은 하나도 못 챙기는 경우도 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수많은 피로와 좌절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하고 싶다.
작은 회사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큰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지옥 같았지만, 그 지옥에서 배운 것들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중소기업, 진짜 가지 말아야 할까?”
아마 정답은 없다.
다만 최소한, 내 인생에서는 그 길이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