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악마가 있다

유튜브에서 본 ‘사이다’가 내겐 왜 공허했을까

by 잡생각 수집가

유튜브 알고리즘이 던져준 영상 하나.

제목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썸네일 속 여주인공은 피투성이 얼굴로 웃고 있었고, 조회수는 수백만 회였다.

댓글은 대부분 같았다.


“와, 진짜 사이다다.”

“이게 바로 정의지.”

그런데 나는 그 밑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사이다?

나는 도저히 시원하지가 않았다.

그건 영화 본편도 아니었다. 유투브의 편집 영상이었다.

피해자가 범인들을 잡고, 복수를 완수하고, 영화는 마무리된다.

나는, 이상하게 멍했다.


그걸 보고 나서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답답했다.

“저렇게 죽이면 다 끝나는 걸까?”

그 사람의 고통, 그 분노가 저 한순간으로 풀릴까?

나는 그렇게 믿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가끔 나는 아주 잔인한 상상을 한다.

그냥 죽이는 건 너무 쉬워서다.

죽음은, 그 어떤 형태로도 ‘끝’이 된다.

그런데 내가 원한 건 ‘끝’이 아니라 ‘계속’이었다.

끝나지 않는 후유증.

살아 있는 고통.

평생 자신이 저지른 일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

그게 진짜 복수 아닌가.


나는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자주 만든다.

성폭행범이라면, 그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평생 자신의 잔혹함을 떠올릴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하지 못하게.

얼굴엔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겨서, 아무리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사람들 눈빛이 그를 다시 죄책감 속으로 밀어넣게.

사기꾼이라면, 손가락이 굳어 펜을 잡을 수 없는 상태로.

돈을 벌어도, 병원비로 모두 흘러나가게.

말로 사람을 속였던 인간이라면, 이제는 그 입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로.

살아는 있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형벌이 되는 상태.


쓰고 보니, 끔찍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상상을 할 때 나는 묘한 평형을 느낀다.

“그래, 이래야 공평하지.”

그 순간의 감정은 쾌감이 아니라, 균형감에 가깝다.

“이 정도는 되어야 저 사람이 느꼈던 절망이 조금이라도 닿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 내 안의 분노가 조금 가라앉는다.




그런데, 이건 내가 겪은 일이 아니다.

나는 다행히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없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은 없다.

그냥, 유튜브에서 영화를 본 것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몰입한다.

왜일까.


아마도 ‘내 안의 악마’ 때문이지 않을까?

모든 인간은 평소에는 착한 척하며 산다.

법을 지키고, 도덕을 말하고, 예의를 지킨다.

하지만 그런 평온은 생각보다 얇은 막 위에 있다.

그 막이 한 번 찢어지면, 누구든 다른 존재가 된다.

그게 악마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마 그건 내 안에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영화 <악마를 보았다>도 그랬다.

이병헌이 연기한 주인공은 연쇄살인마에게 약혼자를 잃고, 끝없는 복수를 이어간다.

잡았다 놓아주고, 다시 잡고, 다시 놓는다.

관객들은 그 과정을 보며 ‘이건 진짜 지옥이네’라며 몸을 떨지만,

나는 거기서도 똑같이 허무했다.

“결국은 죽이는 걸로 끝이네.”

dINhdYms2za5K8_aKDmchz4ZPus.JPG


그렇게 죽여버리면, 그 괴물은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는다.

고통은 살아 있는 자의 몫인데,

죽음은 그것마저 빼앗아 간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살려두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했던 짓의 대가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지.


손 하나 제대로 못 쓰고, 욕망도 느낄 수 없고,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채로 살게 하지.

하루에도 몇 번씩 “차라리 죽고 싶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진짜 복수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동시에 놀랐다.


“이게 정말 내 생각이 맞나?”

영화를 껐는데도 장면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복수의 디테일을 떠올릴수록, 그 고통의 리듬이 내 안에서 박자처럼 뛰었다.

나는 그 생각이 무서웠다.

그렇게까지 상상해버리는 나 자신이, 진짜 악마 같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게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억울했던 기억이 있다.

그게 크든 작든 간에, 마음속 어딘가엔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대부분은 그 감정을 눌러놓고 산다.

하지만 어떤 아주 큰 자극이 오면, 그 감정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내가 영화에 몰입했던 것도, 아마 그 본능이 건드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복수라는 건 정의와 닮아 있지만, 동시에 욕망과도 닮아 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정의를 요구하면서도, 그 과정이 시원하게 느껴지길 바란다.

그러다 보니, 정의는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하고, 복수는 더 잔인해진다.


그게 인간의 모순인 것 같다.

정의를 말하면서, 동시에 피를 원한다.

나는 그 모순이 나에게도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무섭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상황이 달라지면 뉴스에 나올지도 모른다.

‘온순했던 남성이, 충격적인 복수를…’


그 문장이 뉴스 속에서 내 이름으로 시작될 수도 있다.

그걸 상상하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결국 나는 그 영상을 닫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모니터를 멍하게 바라봤다.

‘내 속엔 악마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웃긴 건,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처럼 들렸다는 거다.

내가 악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인간으로 느끼게 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아직 아무 일도 겪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지금 다행히 평범하다.

가족도 안전하고, 친구도 있고, 내 삶은 안정적이다.

그래서 감사해야 한다.

왜냐면, 진짜 불행이 닥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르니까.

내 안의 악마는, 아직 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걸 깨우지 않는 게,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뉴스 속 잔혹한 사건을 본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도 한다.
혹시 저런 잔인한 죄인들에게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트리거’가 있었던 건 아닐까.
정말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을 거기로 밀어 넣은 건 아닐까.
물론 그걸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는 없다.
다만, 그 가능성을 떠올릴 때마다 묘하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더 복잡하게 느껴진다.

내 속엔 악마가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악마가 진짜로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나는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 살아야 한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그 목소리를 듣고 흘려보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혹시 나보다 더한 상상을 해본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겠지. 하지만 나는 그게 아직 내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증거라고 믿고 있다.

이렇게라도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생각이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나는 그 선을 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으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브런치, 작은 SNS에서 배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