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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민지 Oct 17. 2022

멜론, 한라봉 그리고 딸기

20대에는 몸이 삐걱거리면 아이러니하게도 어르신처럼 삼계탕, 해천탕, 염소탕 같은 보양식을 찾았다. 진득한 국물을 마시고 몸에 기름칠하면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졌다. 그런 ‘음식’빨은 20대에나 먹히는 것인지 요즘은 영 기운이 없어도 그런 음식들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계절별로 몸이 찌뿌둥한 시기가 찾아오는데 이때 나는 제철 과일을 찾아 먹는다.


작년 여름에 한차례 큰 파도를 넘기고 나서 눈코 뜰 새 없이 일들을 해결하다 보니 가을이었다. 모든 일이 다 해결되니 정신이 풀어지고, 정신이 풀어지니, 몸이 아팠다. 아픈 몸을 어찌할 지 몰라 널브러져 있을 때 아직도 마음이 많이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여동생이 자주 나를 들여다봐 줬다. 죽었나 살았나 체크를 한 건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또 오늘은 얼마나 슬픈지를 물어봐줬다.


 그날도 여동생이 생사 확인을 위해 우리 집에 방문했고 나는 멜론을 썰었다. 추석 때 엄마가 굳이 하나 들고 가라고 성화였기에 이고 지고 가져온 멜론을 손도 대지 못하고 냉장고에 모셔 두었다. 1인 가구에서 은근히 손을 대기 어려운 과일이 멜론이지 않을까? 껍질도 많이 나올뿐더러 씨를 바르고 예쁘게 모양을 내서 써는 것까지 여간 번거로운 과일이 아니다. 그 까다로운 과일을 정성스레 깎아내는 것은 언니가 있는 곳까지 2시간을 넘게 운전을 해서 찾아오는 동생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뭐라도 꺼내 먹이고 싶은, 어딘가 시골 할머니를 닮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선선하면서도 쌀쌀한 가을밤에 멜론을 먹었다. 


그해 겨울에는 여동생이 전화해서 오빠(나에게는 남동생)가 한라봉을 집으로 보냈다고 자랑했다. 가끔 이런 형평성에 어긋나는 거래(?)가 오가는데, 순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딱히 내가 남동생에게 해준 건 없다. 잘 안다.) 


오랜만에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기회가 있었고 나는 반농담으로 한라봉 이야기를 꺼내면서 남매는 한라봉 한쪽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항의했다. 좁고 좁은 내 마음의 크기에 또 한 번 놀란다. 한라봉 하나 못 먹는 게 뭐 그리 서럽다고. 남동생은 그 이야기가 얼마나 신경 쓰였을까? 다시 만난 설에 남동생은 한라봉을 한 꾸러미 주면서 맛있게 먹으라고 웃는다. 시골 할머니가 된 나는 마음 넓은 남동생의 한라봉을 보면서 마음이 시큰해진다.


기온이 한번 오르더니 2월 끝자락에 큼직한 딸기가 많이 나온다. 오랜만에 딸기를 씻고 꼭지를 하나하나 다듬어서 강아지들 한입씩 챙겨주고 나도 몇 알 주워 먹었다. 케케묵은 방에서 딸기향이 오르고 머리카락 끝까지 딸기향이 묻은 느낌이다. 저녁에 먹은 기름에 볶은 소시지, 계란후라이, 미역국이 느끼했는데 시원하게 속을 정리해준다. 겨우내 나 모르게 아팠던 감정들도 같이 정리되는 기분이다. 딸기 몇 알로 이렇게 재충전이 되다니. 


그렇게 봄이 다가오는 계절에 딸기를 먹고 있으니 멜론 먹었던 가을과 한라봉을 먹었던 겨울이 생각난다. 몸과 마음이 상했을 때는 제철 과일을 먹어보라.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나눠 먹어 보길. 더 나아가서 네 생각이 났다며 선물도 해보길 바란다. 계절을 챙기는 것은 자신을 잘 챙기는 좋은 방법이다. 맞이하는 계절마다 누군가를 챙기는 것도 나에게 주는 행복이다. 이번 주말은 할머니 기일이고 모두 모이기로 했으니 예쁜 딸기들을 가득 들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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