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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민지 Oct 17. 2022

봄에서 여름으로

절기가 있듯이 내 생체리듬에도 탈이 나는 시기가 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때 꼭 앓는다. 속이 묵직하고 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땀을 삐질삐질 쏟고 약을 털어 넣는다. 모든 걸 게워낸 후 깨닫는다. 1월부터 쉬지 않고 달렸다는 것을. 6월 미지근한 방바닥에 착 달라붙어 생각한다. 굶자. 쉬자. 미지근한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일찍 눈을 감는다.


계절이 바뀔 때면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뒤를 돌아보고 있다. 빼곡하게 달려온 시간만큼 머리 속이 꽉 차서 한 번 비워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계절은 인생의 알람시계 같은 것 아닐까? 이번 계절이 끝나가니 다음 계절을 준비하라는 지구의 따뜻한 배려 같은 것. 


충분히 아파하고 일어나면 오히려 모든 것이 선명하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 머리를 비울 겸 몸을 움직인다. 6월의 햇빛은 아직 봄 같다. 공기는 훗훗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니 좋다. 인스턴트 죽을 몇 숟갈 뜨고 아이스 커피를 연하게 타 마신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처럼 약간의 비장함이 있다. 머리 속을 하얗게 만들고 신나는 노래로 가득 채운 노동요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목적은 하나다. 상념을 내려놓고 새 계절을 맞이하는 것. 


여름 옷가지를 모두 꺼내고 분리한다. 작년에도 안 입은 옷, 작년에 입었지만 해진 옷, 작년에 입었고 올해도 입을 수 있는 멀쩡한 옷. 버려야할 옷들을 모두 비닐봉투에 담는다. 그리고 버리지 못한다. 해진 옷은 잠옷으로 입을 수 있을 것 같고, 작년에도 안 입은 옷은 올해는 꼭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비닐봉투를 봉하고 가을이 오면 처분한다. 가을이 올 때까지 꺼내 입지 않았다면 내 옷이 아닌 것이다.


깨끗하게 세탁한 옷들이라도 서랍장에서 1년을 지내면 묵은 냄새가 난다. 그 냄새가 코끝을 스치니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 없이 머물러 있다면 묵은 냄새가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결국에는 우리는 어느 방향이든 나아가야하지 않을까? 청소를 하는 중에는 이런 상념을 하지 않기로 했는데도 잘 안 된다.


여름 옷을 빨 때는 좋아하는 섬유유연제 대신 식초를 넣는다. 살균효과도 있고 환경 오염을 줄일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땀냄새, 묵은 냄새 등을 제거하는데 효과적이다. 세탁이 완료되면 옷을 널러 가고, 세탁기는 다른 옷가지들을 다시 세탁한다. 한 번에 많은 빨래를 넣지 않고, 세탁기통에 반 정도만 차게 옷을 넣고 세탁해야 세탁기에도 좋고, 빨래 상태도 좋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건조는 건조기가 해주는 시대다. 빨래하는 수고로움이 많이 덜어졌다. 하지만 건조기가 없는 나는 빨래건조대를 들고 옥상으로 간다. 건조기의 보송보송함은 없지만 햇빛과 바람이 빳빳하게 말려주는 옷감의 느낌이 좋다.


발바닥이 까매진 흰 양말들은 조물조물 빨래비누를 묻혀가며 손으로 빠는데 우리 엄마는 이 모습이 여간 궁상스러워 보인다고 하신다. 그래도 다시 새하얗게 태어날 수 있는데 단지 발바닥이 까매졌다는 이유로 쓰레기통에 버리기에는 아깝지 않나? 그릇에 고추가루가 묻어 있으면 다시 설거지하면 되고, 금이 갔으면 버리면 된다. 양말이 찢어지지 않는 이상 나와 더 긴 인연을 보낼 물건인 것이다.


세탁기를 4번 정도 돌리고 나니 세탁물에서 천원 한 장, 백원 하나 나오지 않은 것이 아쉬우면서도 작년 여름에는 정신을 잘 차리고 살았던 것 같아 이상하게 뿌듯하다. 


세탁과 건조가 반복되는 사이에 배수구 청소를 하고, 냉장고 정리를 하고, 선풍기 날개를 닦고, 에어컨 필터를 세척한다. 땀이 목을 타고 흐르지만 시작한 김에 끝내야 개운하다. 마른 빨래들을 모두 개고 나면, 어제 체했던 게 맞는건지 싶을 정도로 허기가 진다. 든든한 끼니를 차려 먹고 깨끗한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으면 올 여름도 걱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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