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구를 좋아하시나봐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저의 최애 캐릭터예요.” 나보다 1~2살 많은 그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조금 실망스러웠다. 나이가 몇인데 짱구를 좋아하다니. 아 이렇게 꼰대력이 업그레이드 되나보다.
취향 존중. 사회에 나오면서 가장 처음으로 학습했던 것이 바로 ‘취향 존중’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자기 영역에 존재하는 것만을 취향으로 삼는다. 대표 시골 촌뜨기인 내가 처음 홍대에 갔을 때 홍대는 마치 팔레트같았다. 모두 다른 취향과 개성을 뽐내고 있었고, 그 속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세상에나 서울에서는 메이드 복장을 실제로 입는구나. 저 사람은 머리색이 정말 새파랗구나. 우와 한쪽팔 전체가 다 문신이야.
마카롱이 유행을 타더니 뚱카롱으로 발전했다. 이쯤 젊은 사람들 모두 뚱카롱에 지갑을 열었다. 오픈하는 매장마다 긴 줄을 만들었고, 단순했던 색깔의 마카롱들은 급격하게 창의적으로 변했다. 우리 회사 근처에도 마카롱 가게가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직원들이 점심시간마다 우루루 달려나가 마카롱을 10개씩 집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해되지 않았다. 왜 소중한 월급으로 간식에 3~4만원을 쓰는거지? 아재 입맛, 할미 입맛, 초딩 입맛처럼 어떤 섹션으로 분류되는 입맛의 개념을 부르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그들의 입맛이 달달구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는 후배는 ‘다이소’제품을 유독 많이 애용했는데, 어느날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을 ‘다이소’에서 산 것을 듣고, 안경 같이 오래 써야하고, 눈 건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에는 돈 좀 쓰라고 핀잔을 줬다. 적어도 건강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돈을 써줘야 맞다고 내 취향대로 판단한 것이다. 내가 쓰는 안경은 과할 정도로 비쌌고, 나는 안경을 구매할 때 피곤할 정도로 시간을 많이 썼다. 내 안경 취향을 토대로 그 후배를 평가한 것이다.
내가 만난 수많은 꼰대들도 나에게 아낌없이 나의 취향을 평가했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외롭지 않아? 심심하고 재미없을 것 같은데 엄청 열심히 다니네.’
‘탈색머리에 얼마를 썼다고? 돈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이 수세미 얼마야? 2500원? 뜨개질을 해서 고작 2500원을 버는거야?’
무자비한 평가들을 당해놓고도 나는 그들처럼 주제 넘는 평가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취향에 내가 보탠 것은 단 한개도 없으면서, 그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내가 조금 더 살아봤다는 이유로 그들을 평가했다. ‘취향’의 개념을 고급과 저급으로, 과소비와 검소함으로, 호감과 비호감으로 나누는 전형적인 꼰대의 세계에 입문했을 때 다시 상기시켰다. 모두를 이해하는 힘은 ‘취향 존중’에서 나온다는 것을.
레고만 보면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사람과 나이키 운동화를 모으는 사람, 전국의 모든 빵을 먹으러 다니는 사람, 오프숄더와 크롭티와 언더붑을 입는 사람 등 모두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취향과 개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나는 그저 ‘취향 존중’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혓바닥이 길 필요가 하나 없다.
물론 아직도 취향 존중이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콜라를 박스째로 사다놓고 마시는 것, 도로에서 부아아앙 소리를 지르는 튜닝카들, 전방 100m에서 향수 냄새를 뿜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취향존중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반성의 글을 쓰는 것은 우리가 서로에 대해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주어야만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작은 취향만으로 한 인간을 온전히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당신의 취향을, 그리고 당신을 존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