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6번 칸> 리뷰
잠시동안의 인연이라고 해도 평생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그때의 기억으로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우연한 악연이 진지한 만남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며 시간이 지날수록 깊게 번져가는 이들의 세세한 감정과 관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제74회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던 유호 쿠오스 마넨 감독의 영화 <6번 칸>은 8일 개봉하여 관객에게 선보인다.
6번 칸의 첫 만남.
말의 자취를 따라가는 대화 속 알 수 없는 말이 오가며 웃음소리로 가득 찬 공간을 비춘다. 어떤 문구를 제시하면 그 말을 한 사람을 찾는 게임이었고 라우라는 소외된 채, 상기된 얼굴로 어색하게 앉아 있다. 어눌한 러시아어 발음과 답을 맞히지 못한 사실을 애인인 이리나가 부각하며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준다. 그렇게 낯선 곳에서 느껴야 했던 서운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전에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이리나의 일정으로 인해 여행을 홀로 가게 된 라우라는 고대 암각화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 무르만스크행 기차에 탑승하게 된다. 연인과의 동행이 무산되면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며 탑승하게 되는데, 기차 6번 칸이 불편함 그 자체가 될 줄이야.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이 공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몇 시간을 있어도 낯설고 불편한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 다시 6번 칸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돌아온 기차 안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술에서 깬 효라는 사뭇 달랐다. 다소 엉뚱하지만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이다.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씩 마련해 주듯 기차가 멈추고 료하는 라우라에게 동행할 것을 제안한다. 그를 거절하는 라우라를 뒤로하고 갔나 싶었던 료하는 그녀가 위험에 빠지자 도움을 주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낯선 위로 속 따뜻함.
홀로 견뎌야만 했던 힘든 시간을 뒤로하고 료하의 뒤를 따라가면서 낯선 사람이 건넨 말에 위로를 받는다.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버려질까 봐 두려웠던 그 마음이 '내면'이 시키는 말을 듣게 되면 더 이상 타인을 위한 내가 아닌 나를 위한 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일까.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넘어서는 감정이 자리 잡으면서 이들의 관계는 또 다른 양상으로 뻗어 나간다. 본격적으로 이 미묘함은 낯선 이의 등장으로 더욱 명확해진다. 타인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을 베풀고 싶었던 마음에 건넨 친절함은 그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배신을 당하게 되며 산산조각 난다. 그런 부서진 마음에 서툰 위로를 건네는 료하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그렇게 깊어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민망한 상황을 연출한다. 그렇게 흐지부지하게 지나간 다음 날, 예정되어 있던 암각화를 보러 온 라우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며 절망에 빠진다. 과연 라우라는 암각화를 볼 수 있을까.
내면이 시키는 말을 들으렴.
살면서 모든 걸 네 인생에서 이룰 수 있길 바란다.
네 내면의 동물을 위하여.
정거장을 지나친 관계의 열차.
새로운 환경에 놓인 라우라는 캠코더에 기록되어 있는 과거의 기억들을 보면서 낯선 환경을 극복한다. 그것이 회피의 대상물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노력을 어찌 타인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항상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빼놓지 않았던 라우라는 자신의 전부와 다름없었던 캠코더를 도난당하게 되면서 외로움의 민낯을 들키고 만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현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잠시 미뤄두었던 상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소중히 여겼던 것들은 사실 일부에 불가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관계에 최선을 다하며 아름다움으로 가득하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난 사랑, 끝나버린 관계를 매듭짓고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우연한 만남이 가져다준 삶의 변화, 그것은 정거장을 지나친 관계의 열차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열차를 맞이하게 했다.
이 넓은 세상을 겉도는 이방인.
라우라가 흔적을 중요시 여겼던 이유는 "우리에겐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가 중요한 거야."라는 말처럼 철저하게 이방인이 되어야만 했던 사회에 의해 배제당했지만 그럼에도 소속되고 싶었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마음의 염원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적막 속의 바다, 그 속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여정이다. 첫 만남은 비록 엉망이었지만 낯선 이곳에서 익숙해져 버린 사람과의 동행은 내내 겉돌던 마음이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는 솔직함으로 번져간다. 그렇게 내면의 결을 가다듬게 되며 스며드는 두 사람이다. 남녀 간의 사랑보다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중점으로 철저한 마음의 일도, 성취의 일도 다른 것들로 대체할 수 없는 그런 기억으로 가득 채운다. 내내 겉돌던 마음이 어떤 만남으로 인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only parts of us will ever touch parts of others / 우리의 일부분만이 다른 사람의 일부를 만지게 한다."라는 문구는 메릴린 먼로의 명언이며 오프닝 시퀀스에서 나왔던 문구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 몰라도 '진심'이 통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상실 속의 발견은 흔적에 의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모습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여기서 헤어지더라도 언젠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한 밤이었다.
비포 선라이즈에 알코올이 잔뜩 뿌려진 영화의 흐름이 다소 잔잔하지만 흥미롭게 느껴진다. 목적지는 같았지만 목적은 달랐던 그와의 대화를 통해 현실적이지만 조금 더 짙은 따뜻함을 지니고 있어 영화의 여운을 남긴다.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을 가능하다고 노력해 주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의 여정은 비록 짧지만 강렬하다. 다만 료하의 감정이 더 자세히 나오지 않아 아쉽게 느껴질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