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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드레 Oct 15. 2023

동물 보호라는 모순에 대하여.

영화 <당나귀 EO> 리뷰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신작 <EO>는 제75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당나귀 발티자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라고 한다. 동물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 세상의 모습을 과연 어떻게 드러냈을지 궁금해진다. 당나귀 EO의 인간 세상 여행기를 다뤄낸 영화 <EO>는 10월 3일 개봉했다.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단순한 편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당나귀 EO는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서커스단이 폐쇄되며 예상치 못한 여정에 오르게 된다.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EO가 사는 공간은 마구간으로 이동한다. EO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일에도 사는 환경이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달라진 환경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EO의 기억에는 서커스단 소녀와의 추억이 가득 담겨 있었다.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 익숙했던 EO에게는 인간 세상이 너무 당연하게 외롭고 낯선 공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앞에 나아가게 만드는 건 서커스단 소녀가 이름을 부르며 다정하게 등을 쓰다듬어 주던 손길이었다.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슬픔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그를 다시 찾아와 생일을 축하해 주는 소녀의 뒤를 따라가며 EO의 여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사람은 저마다의 모순을 지니고 있다.

여정은 동물 보호 단체에 의해 서커스단이 해체되며 시작된다. 이는 자연스러우면서도 EO에게 있어서 혼란스러움을 가져다준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자유란 건 낯설고 두렵기만 한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일명 '착취'의 공간에서 벗어났지만 또 다른 공간에서 인간을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던 동물 보호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동정심과 책임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도 같았다. 인간들은 EO를 도와주지만 고삐를 풀어주지는 않는다. EO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다른 동물들의 모습 또한 EO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영화의 장면들을 통해 마주할 수 있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동물들의 울음소리, 숨소리가 전부이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이것 또한 인간의 관점이라는 게 안타깝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은 어떤 희망조차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함이 가득할 때이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대한 동물의 관점에서 보려 노력했지만 영화의 부분이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들이었고 인간에 의해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중 가장 애매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의 시선이 오로지 EO의 관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곳곳에 인간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EO의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는 장면이기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정도이다. 그 인간들과 함께하는 순간마다 바라본 그의 눈망울은 가련하기만 했다. 달라졌지만 크게 변하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동물 보호를 위해 한 일들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대상에게 필요한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물 보호라고 행했던 것들이 결국 EO에게 익숙했던 삶의 터전을 잃게 만들었고 가장 사랑받았던 기억을 송두리째 앗아간 결과로 이어졌다는 게 참 안타까웠다. 결국엔 형식상의 동물 보호라는 정의를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관점의 동물 보호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단순한 EO의 여정으로 마무리가 됐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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