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엄마와 창녀> 리뷰
장 으스타슈 감독의 <엄마와 창녀>는 제26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아 심사위원특별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이다. 누벨바그 이후 프랑스 영화의 전환점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장 뤽 고다르 감독이 <엄마와 창녀>를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칭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영화는 대중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엄마와 창녀>는 삶의 다양한 측면을 솔직하게 묘사하여 개인의 자유와 책임, 사랑과 성의 본질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져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돕는다.
무직 청년 알렉상드르는 질베르트와 사귀는 동시 마리와 함께 살았다. 알렉상드르는 아무런 직업을 갖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한 남자다. 그는 한 여자와 안정적인 가정을 꿈꾸면서도 습관적으로 새로운 여성과 만남을 주도한다. 여자들을 그의 자유분방함, 재치 있는 말솜씨, 그리고 순수함을 매력적으로 느끼며 그와 정신적/육체적 관계를 맺게 된다. 가벼운 만남, 가벼운 관계가 그의 철학인 걸까. 질베르트와 멀어진 사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는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직후, 카페에서 책 읽고 수다를 떨던 중 베로니카라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관계를 시작한다. 마리와 베로니카 사이에서 사소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알렉상드르. 그들이 함께 살면서 본격적인 삼각관계가 심화된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며 느끼는 자유분방함과 그로 인한 무책임함은 중요한 순간에서 조차도 '선택'을 여성에게 미루는 모습이다.
영화의 제목은 파격적이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영화는 알렉상드르의 가치관과 주변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되며, 그들의 편하고 적나라한 대화를 통해 이루어져 있다. 영화 <엄마와 창녀>는 그의 삶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택한다. '엄마'로 상징되는 마리는 경제적 도움, 보살핌, 안정, 무조건적인 사랑을 상징하며, 정신적 관계로서 투영된다. 반면, 베로니카는 '창녀'로 상징되며 자유, 열정, 흥미, 성적 욕망을 상징하며, 육체적 관계로서 투영된다. 마리와 베로니카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엄마와 창녀의 경계선이 흐릿해지기 시작하고 알렉상드르는 둘 사이를 오가며 방황한다. 이처럼 안정과 자유를 상징하는 두 여성은 알렉상드르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며, 알렉상드르의 선택은 누구를 향하고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결국, 알렉상드르가 아닌 베로니카가 모호한 경계에서 벗어나 선택을 하게 된다. '엄마'로서의 자신이 될지, '자신'으로서의 자신이 될지는 그녀에게 달렸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들끓게 했던 68년 운동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 자체로도 여러 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단순하게 '취급되기엔' 상당히 큰 영향을 주었던 혁명이다. 프랑스 성 혁명으로 인해 과도기에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이념이 뿌리내리며, 사회적 변화와 불안정이 공존했다. 그 모습은 알렉상드르를 중심으로 한 세 남녀의 관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개인적인 욕망이 우선되는 경향을 나타내며, 이로 인해 책임을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여러 가지 중의적 표현을 위해 엄마와 창녀와 같은 제목을 썼지만 이에 대한 거부감도 물론 존재할 것이다. 여성이 남성의 시선에 의해 ‘엄마’ 혹은 '창녀‘라는 분류로 설명되는 부분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이처럼 그 혁명을 여성에 빗대어 표현하며 날카롭게 비판한다. 사회적 배경과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남자들에 의해 소비되는 창녀의 몸처럼 '혁명'의 정신 또한 누군가에 의해 평가 절하 되는 모습에 분노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 혁명의 실패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알렉상드르처럼.
특히 프랑스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것이 1946년이며, 공식적으로 남편의 동의 없이 여성이 은행 계좌를 열거나 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1965년, 경구피임법이 합법화된 것이 1967년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직까지 혁명의 길은 멀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혁명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시대가 되었지만 바뀔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인해 허무주의를 담고 있는 사회의 분위기를 담아낸 영화였다. 영화는 상당히 간단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 간 나누는 대화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묵직한 것으로 나열되어 있다. 영화는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인물 간의 관계나 대화를 통해 감정의 복잡성과 인간의 욕망, 불안과 고통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육체적/정신적 내연관계에 있는 세 사람 간의 솔직한 대화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숨기지 않고 서로에게 털어놓는 모습을 통해 더욱 사실적인 표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3시간 40분이라는 긴 상영시간과 느린 전개가 지루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대화 만으로 이루어진 전개가 흥미롭게 여겨진다는 장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관계와 감정이 다뤄진 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면 볼수록 허무함이 짙어진다. 한 마디 말로 관계의 봉합과 단절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토록 사무치는 일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 으스타슈 감독이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삶의 모습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영화와 세상을 이어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이뤄내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는 건 명확했다. 빛과 어둠 속에서도 강렬하게 빛을 내고 있는 그의 작품은 여전히 기억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