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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드레 Mar 07. 2024

가시를 걷어내고 마음을 드러내는 일.

영화 <고슴도치의 우아함> 리뷰


모나 아샤쉐 감독의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인간의 본성과 욕망에 대해 깊이 있는 고찰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뮈리엘 바르베리의 소설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36회 시애틀국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로 섬세한 캐릭터 설정과 감각적인 연출로 관객들에게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팔로마의 시점.


12살 소녀 팔로마. 그녀는 상류층 거주자들이 사는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그들은 대부분 화려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그렇게 보장된 부, 그로 인한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어 있는 환경에서 자란 팔로마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어른들의 세속적인 모습을 지켜보며 '어른들이 파리처럼 유리벽에 부딪히는 세상'이라 표현하고 세상을 '어항'에 비유한다. 그런 상황을 겪기 전에 13살이 되는 생일인 6월 6일, 165일 후에 자살하기로 한 것이다. 죽는다는 사실이나 몇 살에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죽기 전, 나만의 에베레스트를 만들어내기로 한다. 주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어  타인과 나의 삶이 왜 부조리했는지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죽음이라는 것.


팔로마는 가족들을 피해 숨지만 항상 그 장소를 들킨다. 자신 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고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그 순간마다 방해받는다. 그렇게 타인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즐기는 것 같으면서도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절망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경쟁의 치열함과 어른들의 위선을 견디지 못한 팔로마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 단계를 실행하기 전 어른들 몰래 숨어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한다. 다소 장난스럽게 여겨지는 팔로마의 행동은 아직 죽음이라는 무게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지만 쉽게 단언할 수 없는 죽음의 무게는 소중한 누군가가 떠나고 나서야 체감할 수 있다. 아마 팔로마도 그리 느꼈을 것이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팔로마는 세상의 치열함 속에서도 '살아가며' 지금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지 않을까.



르네의 시점.


르네는 수위라는 직업에 자신 본연의 모습을 감추며 살아간다. 아파트의 주민들이 생각하기에 수위라는 직업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학력이 낮은 것으로 인식되지만 르네는 그와 정반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즈라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삶에 희망이 생긴 것뿐만 아니라 진짜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고슴도치 같은 우아함을 가지고 있는 르네는 처음엔 용기 내지 못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역할을 벗어나면서 생기는 또 다른 편견이 두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팔로마를 만나고 나서 '행동'할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은 이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끝에는 후회로 물들었지만 행동하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사랑을 그녀의 우아한 용기를 통해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팔로마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순간이 마지막이라 하더라도 사랑으로 가득한 현재로 장식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고 있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카메라는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수단으로 쓰인다. 주로 팔로마의 사색이 담겨 있으며 주변 사람들은 찍히는 것을 꺼려한다. 사람들은 우아하지 않더라도 저마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 나아가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가진 이들만이 가지는 특별함이 그것을 돋보이게 만든다. 카메라에 담기는 것은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와 친한 르네는 함께 하는 것도, 카메라에 담기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내면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마음의 눈으로 친구가 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 따뜻한 온기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미숙함이 불러오는 불안감.


특별해지고 싶은 어떤 미숙함이 불러오는 어떤 불안감에 대한 이야기다. 이루어져야 할 통찰은 맞으나 이 또한 명확하지 않아서 인간세상의 정의는 혼란만이 잔재한다. 그 답답함을 묘사하기 위해 세상을 어항에 비유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위선적인 가족의 모습을 담는 모습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세상을 비유하는 방법이 인상 깊었던 반면, 그들의 관계성이 약했다. 무엇보다 세 사람의 관계성에서 오즈와 팔로마, 오즈와 르네의 연결고리는 단단하게 연결된 것 같은데, 르네와 팔로마의 연결고리가 미약해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해답을 찾는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가장 중요하게 드러나야 했던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느껴진다. 그래서 결론이 어떻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이 또한 인생임을 우리는 모두 세상 속에 살아가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 같으나 사실로서 마주할 수 있는 주제의식이 또렷하지 않아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해답을 내가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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