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드레 Mar 28. 2024

자연에서는 감히 이뤄지지 않을 인간의 실체적 욕망.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끝나지 않길 바라며 시계를 본 영화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작과는 조금 많이 다른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2024년 3월 27일 개봉한 영화이다. 제80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제작 국가인 일본보다 한 달 먼저 한국에서 개봉한다고 한다. 자연 속에서 펼쳐가는 이야기를 차분히 따라 음악과 자연스레 어우러진 풍경을 마주하다 보면 보이는 것들을 통해 자신만의 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자연에 자연스럽게 젖어든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마을에 글램핑장 건설을 위한 설명회가 펼쳐지며 마을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자연 풍경이 펼쳐진 시골 마을에 글램핑장을 짓겠다는 간단한 설명과 다르게 여러 가지 문제점이 존재했다.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는 만큼 그 지역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명확한 지적과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의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실제로 회사 두 달 매출과 맞먹는 중소기업 코로나19 보조금 때문에 급조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속내를 단번에 들키고 만 것이다. 사실은 이들은 연예인 매니지먼트 일을 하다가 갑자기 글램핑장 주민 설명회를 도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황스러움을 감출새도 없이 일을 진행시키라는 대표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중심인물인 타쿠미에게 24시간 관리인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간 와중, 타쿠미의 딸 하나가 산속에서 실종되고 만다.



사소한 이익과 거대한 영향.


글램핑은 회사 두 달 매출과 맞먹는 중소기업 코로나19 보조금 때문에 급조한 프로젝트이다.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일이었다. 장기적으로 인간에게 다시 악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결국에는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마을에 대한 이해를 배제한 후 이루어지는 일들은 오로지 그들의 의지로써 발현되고 만다. 회의감을 느꼈지만 삶의 연속성으로 인해 결국 행하게 되는 이득 쟁취는 인간성의 상실로서 발휘된다. 하나의 실종으로 이어진 이야기의 전개는 단말마의 총성과 가시오갈피 나무의 핏망울은 어떤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죽음이라는 참혹한 현실이 펼쳐지게 되는 걸까. 끝없이 이어질 인간의 욕망은 어디에서 멈출지 가늠도 할 수 없지만 그들이 추구한 이익과 그에 따른 회의감처럼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분명 올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슴의 존재.


사슴은 영화의 전체적인 부분에 빠지지 않는 요소로 작용한다. 등장으로 인해 가장 궁금하게 여겨졌던 존재이기도 했다. 영적인 존재인가, 죽음과도 직결되는 딸의 상징인가,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하지만 늘 사람에 의해 공격당하는 존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영화 속 사람들 중에 가장 자연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던 하나의 실종은 사슴과 공동 운명체처럼 느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슴으로 하여금 가장 피해를 주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마땅히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슴의 모습은 지극히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듯 하나는 사슴에게 공격당한 것으로 은유된다.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모호하게 표현한 것 같지만 결국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장면 중 하나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들고 다시 사라지고 마는 사슴의 존재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슴을 통해 결국 자연과 섞여든 것 같았던 인간에게도 잔재했던 위선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상황에 끼친 영향과 무지함의 크기에 따라 대가를 치르는 모습이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욕망에는 어떤 냄새가 날까.


사람들의 이익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는 욕망의 깊이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끊임없이 피어나는 욕망의 악취는 지극히 상업적인 관점에 의해 전통성은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일정한 이득만 존재한다면 괜찮다는 그 관점이 우리의 표현으로 악의 구렁텅이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정의로 '악'을 판단할 수 없으며 영화에서도 그들에 대해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방향이 다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순간에 변화하는 어떤 이의 무지함을 마주하며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새가 잔혹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마치 대가를 치르듯 이루어지지 않을 인간의 지극히 일상적인 실체적 욕망이 애매하게도 미완의 상태로 남는다. 어떤 것도 실현될 수 없다는 듯 존재하며 소멸을 야기한다. 사실 그 조차도 알 수 없다. 그 끝에는 자연과 사람들이 존재했고 욕망도 연기에 의해 사라진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잔잔하지만 명확한 어떤 시선에 대하여.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와는 좀 다르다. 곱씹어 볼수록 맛있고 또 흥미롭다. 어떤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새롭지 않은 것을 새롭고 또 특별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 깊다. 그래서 기존 감독의 작품과도 많은 차이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영화는 사람들의 내면과 자연의 조화, 끝없는 욕망의 모순 등 인간 존재에 대한 복잡한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결코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다시 한번 섬세하게 관찰하여 사람 중심의 생각을 돌아보게 만든다. 주로 대사를 통해 전달되던 영화의 의미는 침묵으로 일관되어 관찰자 시점으로 존재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의존한다. 특히 영화에서 뒤에서 앞으로 가는 장면과 앞에서 뒤로 가는 장면을 통해 시점의 부재에 대한 카메라의 의도적 연출이 더욱 의미를 명확하게 만든다. 침묵으로 인해 압축된 사람들의 내면은 전혀 알 수 없어 그야말로 불편한 것들로 가득하다. 해소되지 않은 결말의 정체와 사람들의 삶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결말을 맺어버렸다. 자연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인간의 정의와 생각에 맞추는 일이 아니다. 그저 모두가 외부인으로 존재하여 자연에 자연스레 젖어들어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일 뿐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전언처럼 악의 의미와 기준은 철저히 인간의 관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강조한다. 자연의 시각에 따라 인간이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듯 이루어지지 않을 인간의 지극히 일상적인 실체적 욕망은 미완의 상태로 남는다. 어떤 것도 실현될 수 없는 모습으로 존재하며 그들의 전부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자연과 균형을 맞추는 일은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처음과 마지막이 맞닿아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시간의 변화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상류에서 하는 일은 어떻게든 하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합법이라는 이름 하에 이뤄지는 사회적 살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