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영화 <아브라함 계곡> 리뷰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의 <아브라함 계곡>은 1993년 공개된 작품으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시네필 전주 부문에 선정된 이유 있는 고전 명작이다. 이 영화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을 부분적으로 각색했다. 전체적으로 큰 틀은 <보바리 부인>의 줄거리를 따라가고 있지만 한 여성을 통하여 사랑에 대한 시선과 삶에 대한 시적인 표현을 가미했다. <아브라함 계곡>이 펼쳐내는 사랑과 열정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인물들에 대한 뛰어난 묘사력과 사실주의적 비극을 담아내었던 소설을 영화에 그대로 담아냈을지 궁금해진다.
아브라함 계곡에서 인간의 자부심과 분노와 수치심은 신 앞에서 헛되며 세상 일들이 꿈결 같고 아주 위선적으로 보인다. 한때지만, 크나큰 자부심으로 살아갔던 아브라함은 종적을 감췄지만 그 공간에 여전히 남아있는 흔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카를로스 빠비아는 아브라함 계곡에 정착하여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중심가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노신사와 14살 엠마를 마주하게 된다. 그날 이후 달라진 카를로스는 와이프에게서부터 의심을 받게 되지만 별일 없다는 듯이 행동하며 의심을 피했다. 속마음을 알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한 계절이 한 꺼풀 벗겨지며 가을이라는 계절이 성큼 다가온다. 전보다 더 아름다운 에마, 그녀를 명확히 기억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해본다. 그 모습이 과연 에마의 시선을 끌 수 있을까.
사랑과 자유로움을 꿈꾸는 에마. 아우구스타로부터 충고를 듣지만 깊게 새겨들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그녀가 크면서 아름다움이 위험 요소가 될 것이라 단언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건네는 우아한 말속에 교묘한 무례함은 반감을 불러온다. 그 말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하자 적절치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 바람에 자신의 몸을 맡기던 에마는 또 다른 불편한 시선을 느낀다. 뻔뻔하고 염치없는 욕구의 시선은 에마의 어딘가에 닿아 발가벗겨진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다. 에마의 아름다움은 의도치 않은 불편함을 만들어냈고 그녀의 자유로움을 통제했다.
꿈과 욕망과 열정은 단지 누군가를 갈구하는 것이고 육신에서 비롯된 가식적인 성적 감정은 변화무쌍한 인간 본성의 추악함이었다.
그러던 날, 장례식을 통해 에마와 카를로스는 다시 만나게 된다. 카를로스는 한층 더 아름다운 에마의 모습에 놀랐고, 에마는 카를로스의 슬픈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영화 속에서는 "슬픔은 희생의 보상이었다."라고 표현한다. 그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식은 아브라함의 교회에서 하게 된다. 그리고 룸살에서 아브라함으로 거처를 옮겨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늘 왕진을 나가는 카를로스에 방치된 기분을 느끼는 에마, 빠비아가의 여자들은 그런 에마를 경박하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은 무도회에서 시작된다. 트로피처럼 여겨지는 에마는 주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어쩌면 소외된 기분을 느끼게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 온 초대일지도 몰랐다.
에마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모두의 관심사가 됐지만 어떤 의도와 시선이든지 아랑곳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그 무도회는 에마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향취는 그녀 안에 잠재되어 있던 맹렬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카를로스와의 동침으로 욕망을 채웠지만 계속해서 타오르는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발견한 욕망의 정취는 지극히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에마와는 다르게 그를 원치 않았던 카를로스는 조금씩 격차를 보이게 된다.
이 영화는 좀 어렵다. 영화는 장면을 생략하고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채운다. 영화 속에 맴도는 수많은 글자들을 곱씹어서,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의 장면들은 영화 바깥의 목소리를 통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소설처럼 느껴지는 영화의 구성이 인상 깊었다. 수많은 은유와 균형을 잃은 인물들을 통해 감정의 세밀함에 더욱 깊게 접근할 수 있었다. 강렬한 장면이 담겨있지 않아도 마음을 관통하는 어떤 말들이 휘몰아친다. 유독 와닿지 않는 말들, 스쳐 지나가는 그런 허공의 말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그 수많은 은유를 담은 말에 모든 의미가 담겨있는 건 아니었다. 단 몇 마디로 삶이 정의된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순수함은 이 세상에 통용되지 않으면서도 욕망에 젖어들기 적절한 수단이 되었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분명 잘못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계속해서 들리는 에마를 규정하는 수많은 말소리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게 만들었다. 자신의 끊임없이 포장하고 타인을 자신의 시선으로 설명하고 명확한 답을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또 '정의'내리려 한다. 어쩌면 변화 속에서 과거로 잊힐 자신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은유의 무의미함에 지친 나머지 에마는 깊이 자리 잡은 병폐를 치우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어떤 모습을 해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에마에게 도대체 무슨 모습을 바라는 걸까. 그 아름다움이 독이 된 듯 에마에게 순수함을 요구하면서도 우아한 숙녀의 의무를 바라는 어떤 모순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에마는 끊임없이 그녀를 정의 내리려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새장 이후 또 다른 새장으로 옮겨가며 에마의 솔직함은 최고조에 이른다. 욕망으로 대체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들은 이 공간에서 불편하게 여겨진다. 여성의 역할이 제한적인 이 상황에서 최소한의 욕구가 저항으로 비친다. 의도적인 저항은 아니나 분명한 건 그들에게 의미 있는 저항의식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주어져야 할 동등의 자유는 아직까지 먼 이야기에 불과한가 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마의 자유로움은 그저 경박함으로 치부되는 요소로 작용한다.
사랑의 현재가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그저 쾌락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사랑은 형체도 없고 답 또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정의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와 조금 다르지만, 또 현재와도 다른 사랑에 대한 이야기. 욕망에서 시작됐지만 사랑에 대한 궁금증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래서 사랑은 현실과 맞닿아 있는 어떤 비극은 무의미함의 연속이었으며 파멸이라는 환상과 함께 이루어진 것 같기도 했다. 낭만과 현실의 격차는 너무나도 컸고 에마에게 있어서 또 다른 사랑을 꿈꾸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환상적인 사랑과 다르게 에마의 사랑은 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나 보다.
영화 속에서는 남녀관계의 복잡한 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비단, 에마에게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녀부터 시작한 여자들의 사랑은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에마에게 있어서 사랑은 현실감과 거리가 있는 낭만과도 같았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해서일까. 자유를 넘어선 방종과 욕망을 넘어선 욕정은 그 이상의 불꽃을 피워내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부딪힌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과는 다르게 느리게 흘러가는 감정의 시간은 어디를 향하는 걸까. 스쳐 지나가듯 달라지는 마음과 현재의 상황은 에마에게 있어서 그 공백을 채우지 못했다. 현실과는 분명히 다를 어떤 욕망은 잠재우지 못한 채, 몸집을 불렸고 현재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물론 에마는 선을 넘으면서도 늘 거리감을 유지했다. 그녀의 진취적인 발걸음은 미숙했지만 사랑에 한정되었던 감정은 조금씩 방향을 잡아가고 있었다.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둠이 머물지만 그 사이 피어있는 장미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어떤 자부심과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명확함이 어디에 닿는 걸까. 누군가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길 바랐다. 그것이 꼭 '사랑'의 대상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었다. 유일한 의지대상인 라띠냐는 에마에게 있어서 유일한 낙이었다.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사랑의 형태는 편안함에서 신뢰로 발전되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을 뒤로하고 표면적인 우아와 솔직하지 않은 위선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로 나아간다. 에마는 한 떨기의 꽃이 아니다. 그녀에게 더 중요한 건 인간의 본연을 인정하고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바뀌지 않는 삶의 일부를 찾아가는 것이다.
장미는 '흔들림'이나 '흔들리는 것'이래. 꽃의 운명은 짧아. 바람이 불어오면 떨어지고 말아. 왜 장미일까. 바람이 불면 장미가 아니야. 흔들리다 지고 말아.
아래 <보바리 부인>의 전체적인 줄거리.
샤를 보바리라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돈 많은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성격이나 전체적인 것이 맞지 않았다. 그런 괴로움 속에 놓여 있던 샤를은 자신의 환자인 루올의 딸 엠마의 미모에 끌린다. 그렇게 와이프와 사별 후 엠마와 결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엠마는 낭만적인 연애를 꿈꿨고 샤를은 그것에 둔감했다. 그래서 연애할 때와는 많이 달랐고 그에 엠마는 질리고 말았다.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끼며 자연스레 사교계에 빠져들었고 그곳에서 만난 남자들과 불륜을 저지르고, 사치로 인해 빛이 늘게 됐다. 그로 인해 목숨을 끊었던 엠마, 그 사실을 알게 된 샤를은 화병으로 죽게 된다.
*부모를 잃은 딸 베르트는 친척집을 방랑하다 방직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그때 당시 방직 공장은 굉장히 열악했다.)
보바리즘 -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과대망상, 현실과 혼동하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