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리뷰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4년 6월 5일에 개봉한 영화로 마틴 에이미스의 <The Zone of interst>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책임자였던 나치 독일 전범인 루돌프 프란츠 페르디난트 회스의 이야기를 다뤘다. 또, 이 영화는 제76회 칸 영화제 그랑프리 및 칸 사운드트랙 수상작이자,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국제영화상, 음향상을 수상했다.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 홀로코스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영화의 제목이자 원작 소설의 제목인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는 독일어 'das Interessengebiet'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아우슈비츠와 그 주변 지역을 가리키며, 나치가 금전적 이득을 위해 수용소의 포로들을 이용했다.
영화는 담장을 경계로 한 악의 낙원을 보여준다. 루돌프는 주말에 아이들과 물놀이를 가고 밤에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다정한 아빠이지만, 동시에 유대인 학살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소장이기도 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며 일에 매진한다. 누구의 목소리에서 나오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담 너머의 비명 소리와 불과는 다르게 이들이 살아가는 사택은 지나치게 평화롭다. 아우슈비츠의 학살과 철저히 차단된 평화로운 공간은 외부인이 아니면 문제의 심각성이나 죄책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장소처럼 보인다. 밤마다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솟아오르는 불기둥, 심지어 곳곳에서 발견되는 잿더미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루돌프는 바깥의 이야기를 안으로 가져오지 않는다. 루돌프는 학살의 흔적인 피 묻은 부츠를 집 안에 가져오지 않고 바깥에 둡니다. 강에서 밀려오는 잿더미에 다급해지는 그의 모습은 다정한 아버지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끔찍하게 학살을 자행하고도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때 묻지 않은 평화를 가져다주려고 하는 모순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루돌프가 딸들에게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장면과 동시에 흙더미에 사과를 묻어두는 소녀의 모습이 나온다. 글레이저 감독이 계속해서 이 영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던 유일한 빛이자 희망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흙 속에 사과를 묻어두는 소녀는 실존 인물인 알렉산드라 비스트로니-코우오제치크이다. 폴란드 출신의 비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에 살면서 비밀리에 저항 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아유슈비츠 생존자인 유대인 작곡가 요제프 불프의 악보를 발견했던 사실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이런 선의와는 별개로 사과를 발견한 포로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 죽음에 이르게 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햇살이 환하고 따뜻하구나. 인간의 몸은 젊고 늙어, 이곳에 갇힌 우리들의 심장은 아직 차갑지 않아. 영혼이 태양처럼 활활 타오른다, 그들의 고통으로 맹렬하게 깨질 듯이. 곧 우리는 펄럭이는 깃발을 보게 될 거야, 아직은 오지 않은 자유의 깃발
이 저택에서 사는 사람들은 담장너머에 학살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다. 심지어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고, 어떠한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속에서 죄의식도 무뎌진다. 마치 유령을 대하듯 사용인들을 대하며 실수라도 할라치면 "내가 남편에게 말 한마디만 하면 너는 재가 되는 거야."라는 말을 쉽게 내뱉으며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할 학살을 '쉽게' 생각하고 내뱉는다. 그녀는 외부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정원을 가꾸고 현재의 위치를 유지할 방법이 더 중요했다.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는 호칭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이 저택에서 외부인으로 등장하는 헤트비히의 어머니인 리나를 통해 나치 집권을 기점으로 유대인과 여러 독일인들의 처지가 바뀌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헤트비히는 이 저택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불편함을 느끼며 자발적으로 나가는 것은 오직 외부인인 리나뿐이었다.
악의 평범성이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1963년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저 악의 구역으로 나눈 것만은 아니다. 평범한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벽 너머의 홀로코스트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집안의 평화로움은 암전 속에서 계속된다. 영화는 보고 싶은 만큼 보이고 듣고 싶은 만큼 들리는 상황을 재연하듯 화면을 의도적으로 조종한다. 관객은 영화가 의도하는 대로 화면과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직접적인 설명이나 잔혹한 장면 없이도, 폭력성이 짙은 잔혹함을 드러내는 영화의 화법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 영화는 가해자의 가해행위와 피해자의 고통을 최소화하며, 충격적인 사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주변 환경과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그 상황을 충분히 전달한다. 이는 간접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영화 촬영을 위해 집 안팎에 최대 10대의 카메라를 설치하여, 스태프 없이도 촬영이 가능하게 했다. 배우들은 자기들끼리 생활하듯 행동하며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헛구역질하는 루돌프의 모습에서 이어지는 장면은 나치가 몰락한 후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이다. 수많은 유대인들의 죽음이 서려있는 공간은 기억하는 공간으로서 전시되어 있고 후손들은 구역질 나는 역사를 끊임없이 갈고닦는다. 그 역사를 되새겨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것도 바랄 수 없다. 이 불쾌한 소음과 장면들을 계속해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유대인성과 홀로코스트가 수많은 무고한 사람을 분쟁으로 이끈 점령에 이용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로서 이 자리에 서 있다. 하마스의 공격으로 발생한 희생자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숨진 희생자이든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들인데, 우리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겠는가.
글레이저 감독의 수상소감에서도 봤듯이 홀로코스트는 여전히 진행 중인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인인 그가 가해자의 위치에 서겠다는 결심은 지금도 학살이 자행되는 현실에 맞서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폭력이 증가하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홀로코스트
'반유대주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유럽에 만연하게 퍼져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도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항복을 선언했고 베르사유 조약을 맺게 된다. 모든 식민지를 잃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은 막대한 보상금으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독일의 패전에 책임이 있는 극우주의자, 군국주의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 패배의 원인이 유대인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 배후중상설. 설상가상으로 1929년 전 세계에 퍼진 세계 대공황은 독일을 파멸로 몰고 갔고 반유대주의는 폭발적으로 퍼진다. - 유대인은 자본가, 은행가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 지지 상승을 위해 반유대주의를 이용했고 나치당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가 체계적인 말살 정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중간관리자들의 과당 경쟁이 있었다. (하인리히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아돌프 아이히만).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법안과 강제이주, 집단 폭력, 강제노동, 유대인의 재산 몰수, 집단 수용소를 이용하여 유대인을 탄압했다. 추방에 실패하자 홀로코스트의 마지막 단계인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5개의 절멸 수용소 - 헤움노, 메르제크,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