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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드레 May 17. 2022

사랑을 가장한 학대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다.

영화 <비올레타> 리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영화를 가끔 발견한다. 그게 바로 영화 ‘비올레타’다.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이 영화는 보면 볼수록 세뇌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에바 이오네스코의 자전적 이야기인 ‘비올레타’는 딸인 비올레타와 엄마인 한나 사이의 인위적이지 않은 애증의 모녀 관계를 영상으로 나타낸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성애가 이 영화에서는 절대 당연하지 않게 표현된다. 끊어내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 그들은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참혹함을 더욱 배가시킨다.



할머니와 살아가는 소녀 비올레타, 돌아올지도 모를 엄마를 기다리며 그에 대한 애정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사소한 관심에도 애정을 느끼는 비올레타는 엄마와 일을 같이 하면서부터 비틀린 일상을 눈앞에 둔다. 착취를 가장한 사랑을 비올레타에게 쏟으며 자신은 예술계에서의 인정을 받게 되고 어떤 적정한 선을 넘기 시작한다. 동시에 타의에 의한 ‘공주다움’이 허황한 꿈처럼 현실에 직면하게 하여 미성숙한 몸에 미성숙함을 더한다.



할머니의 기도를 외면하듯 비올레타는 한나를 따라간다. 아동성애에 에로티시즘을 덮어씌워 비올레타로 외설이라는 예술을 펼친다. 비올레타의 권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채, 펼쳐지는 예술이라는 허울 아래 드러나는 추악한 악취가 느껴지며 외설을 감춘다. 벗어나고픈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소용돌이치며 학교에서도 어른과 비슷한 옷차림과 행동으로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타의에 의한 착취가 내면의 착취로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미성숙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그 순간을 맞이하며 끊임없이 부딪히는 모녀간의 사이는 둘 사이를 무력 하지만 중재했던 할머니마저 사라지며 돌아갈 수 없는 회복 불능으로 번진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비올레타는 방치된 채로 엄마와 함께 살아야만 했다. 딸의 부끄러움과 수치심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예술 작품이 우선 인 것이다. 그저 비올레타는 한나의 소유물에 불가했다.  어떤 의문은 그저 카메라에 갇힌 채, 벗어나지 못했지만, 비올레타의 뒷모습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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