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백치들> 리뷰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백치들>은 1998년에 개봉한 영화로, 제51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셀레브레이션>과 함께 도그마 95 영화이다. 도그마 95는 1955년 4명의 덴마크 영화감독들이 그들의 영화 정신을 담아 발표한 선언이자 영화 운동이다. 당시 유행하던 작가주의 영화와 할리우드 영화를 모두 배격하고 영화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 질서에 반기를 들고 영화가 나아갈 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더욱 의미가 있다. 보다 사실적이고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화의 이야기가 <백치들>에서 펼쳐진다.
아들을 잃은 카렌은 가족에게 위로받지 못했고 둘 곳 없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 채, 가출을 한다. 그리고 아들의 장례식 전날, 카렌은 한 레스토랑에서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청년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레스토랑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통제 또한 되지 않았다. 처음엔 손에 이끌려 뒤를 따랐지만 왠지 모를 이끌림이 카렌을 그들에게 이끌었다. 청년들이 사는 곳에 도착한 카렌은 그들이 백치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에도 놀라지 않는다. 표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느 언제부터 인지 '백치 연기'를 하는 이들이 느끼는 해방감에 이끌리며 합류하게 된다. 본 목적과는 달리 백치 연기는 기행으로 번지며 위기를 맞지만 한 청년이 각자의 집과 직장에서 백치 연기를 하자고 제안하게 되면서 반환점을 맞게 된다. 과연 이들은 백치 연기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사회의 압박에서 벗어나 어리석음을 자처하고 바보를 연기하며 그들은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또, 백치짓을 널리 알리듯 적극적인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실에 저항하여 이상적인 사회에 발돋움하기 위함이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 이들은 서로의 위선에 의해 와해되고 만다. 다름을 인정받는 것도 거짓의 대가도 전혀 치르지 못한 채, 존재의 의미를 잃었다. 반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던 카렌에게는 뜻밖의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현실 사회에서의 정상범주는 강박으로 다가왔으며 자신의 유일한 탈출구라고 느낀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백치 연기를 가족들 앞에서도 선보이며 자신의 행보를 보여주었지만 공감을 얻지 못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간 '백치'였지만 그들에게는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어리석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 낯설게 느껴진다. 극도로 어두우면서도 장르의 관습에서 벗어나 선 밖의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백치들>에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한다. <백치들>은 파격적이면서도 지루하고 특별함을 찾기가 다소 어렵다. 하지만 곳곳에 숨어있는 저항 의식과 다양성은 그럼에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를 봐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우리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존재하고 안과 밖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 모습을 다소 극단적으로 표현했지만 그 선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주목한다. 그들은 '백치'라는 가면을 쓰고 현실을 살아간다. 백치란, 지능이 낮고 정신이 박약한 상태로, 심각한 정신 지체를 뜻한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한 집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백치라는 강력한 무기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사회에 배려를 받고 이상적인 자신을 꿈꾸고 있었다.
도그마 95 또한 <백치들>처럼 실패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이기지 못했으며 모두가 떳떳하지 못했다. 현실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한 저항 운동은 실패로 끝을 맺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활동이 무의미한 걸까.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더라도 실험적인 정신을 통해 우리의 한계도 느끼고 어떤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이 살아갈 세상이 어떤 마무리를 맞게 될지 솔직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가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진정한 순수함을 찾은 한 사람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마주할 수 있는 순수함에 대한 탐구는 이 영화를 현실 도피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뒷받침이 되어준다. <백치들>은 의미 있는 실험 영화로서 기억에 남을 것이다.
도그마 영화가 갖추어야 할 10 가지 계명
1. 촬영은 반드시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소품과 세트를 사용해선 안 된다. 만약 이야기 전개 상 특정한 소품이 필요하다면 로케이션은 그 소품이 있는 곳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2. 사운드는 절대로 이미지와 별도로 만들어져서는 안 되며, 그 반대도 안 된다. 그 장면이 촬영되고 있는 곳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 음악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3. 카메라는 반드시 핸드헬드여야 한다. 손에 든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움직임이나 정지 상태는 허용된다.
4. 필름은 반드시 컬러여야 한다. 일체 특수 조명의 사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노출을 맞출 만큼 빛이 충분치 않다면 그 장면은 포기하거나, 카메라에 램프 하나만 부착시켜 촬영한다.
5. 옵티컬 작업과 필터 사용을 금한다.
6. 영화에 피상적인 액션을 담아서는 안 된다. 살인, 폭력 등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7.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것은 금지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현재,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8. 장르 영화는 허용되지 않는다.
9. 필름의 형식은 반드시 아카데미 35mm여야 한다.
10. 감독의 이름을 크레디트에 올리면 안 된다.
여기에 더하여 나는 감독으로서의 개인적 취향을 자제할 것을 서약한다. 나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물과 배경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다. 미학적인 고려나 취향, 무슨 대가를 치르든 모든 수단을 통해 이행할 것을 서약한다. 이로써 나는 순결한 서약을 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