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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드레 Aug 02. 2024

경계 끝의 두 사람, 영원으로 기억될 하루 끝의 단어들

영화 <영원과 하루> 리뷰


영원과 하루의 시작.


도란도란 아이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고대도시 전설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한 달에 한번 매번 아주 짧은 시간 금성이 비탄에 잠겨 지상을 떠나 멈추고 몽상할 때, 물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모든 것이 몸추면 시간도 멈춘다." 그리고 세 아이가 모여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이 보인다. 장면이 바뀌고 한 남자를 비춘다. 그는 바다의 짠맛을 씹고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듯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는 멀고 아득한 바다가 아닌 건너편의 어떤 공간을 바라본다. 그 미지의 이웃은 이방인인 그가 세상과 유일하게 접촉할 수 있게 만든 존재였다. 그들에 대한 궁금증이 남아있었고 만나고도 싶었지만 마음을 바꿔 상상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입원을 앞둔 상황에서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알렉산더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시어를 찾아 나서게 된다. 오직 단 하루의 시간 동안 이뤄내야 할 과업이었다.


모든 게 빨리 지나간다. 나의 완고함이 배우고 알기 원하는 이 의심스러운 고통.. 그다음은 암흑, 나를 둘러싼 침묵, 침묵 겨울의 끝자락에서 모든 게 날 믿게 만든다.


도시 한복판에 아이들이 차가 멈추자 세차를 하고, 경찰차가 지나가자 흩어진다. 그런 아이들을 쫓는 경찰과 도망치는 아이를 태워주는 알렉산더였다. 목적지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다가 말없이 내리며 웃음을 짓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렇게 다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알렉산더. 딸의 집에 도착해 엄마의 편지들을 전하고, 해변의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충격적인 사실을 뒤로하고 여정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던 중, 아까 그 소년이 납치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뒤를 조심히 따라가 소년을 구해내며 소년과의 여정이 시작된다. 돌려보내려던 처음의 마음과는 다르게 소년이 내뱉는 아름다운 시어를 놓칠 수 없었다.



삶의 끝에서 만난 영원과 하루의 시어들.


경계 끝의 두 사람이 만난다. 노인과 소년, 정착과 난민, 과거와 미래, 삶과 죽음 그 수많은 단어가 그 두 사람을 가로지른다. 이 짧은 시간에 주어진 하루는 영원할 수 없었지만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함께'한다는 선택이 영원할 수 없었으나 그에게 있어서는 이 여정이 깨달음의 순간이 되었다. 어떤 여행에서 마주할 수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과거에서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것들을 찾게 되는 것이다. 영원과 하루는 전혀 맞닿을 것 같지 않은 단어였지만 소년과의 만남이 그 수수께끼를 풀어주었다. 아이는 노인의 미래이다. 하지만 그에게 현재는 불투명하다. 처음에는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미사여구들이 결국 깨달음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이 영화에서도 지난 과거를 부정하려는 몸부림이든, 깨달음으로 인한 통한이든지 간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건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가 평생 해온 일들이 죽음 앞에서 지난 세월은 더없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영화 제목이자 아내가 남긴 단어인 '영원과 하루' 그 두 단어는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처럼 이질감이 들면서 뇌리에 박힌다. 자신 속의 안나가 말을 걸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도달하지 못한다. 같은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 못한 죄책감과 그리움, 그리고 과거, 가족에게 소홀했던 자신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고독은 짙어진다. 주변인들은 그런 알렉산더에게 언제나 익숙했다. 하지만 안나는 사랑에 빠져 사랑을 갈구해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3년의 시간만큼이나 현재의 아픔이 더 짙은 이유였다.


이슬과 함께 전율하는 새벽 전의 마지막 별은 눈부신 태양을 알린다. 끝없는 하늘에는 구름이나 안개의 흔적도 없다. 연풍의 숨결은 얼굴에 너무나 부드럽게 내 마음의 꽃잎에게 속삭이는 듯 보인다. 인생은 달콤해. 그리고 인생은 달콤해.



사랑과 상실의 끝에서 찾은 영원.


알렉산더는 평생의 과업으로 19세기 시인인 솔로모스의 흩어진 시어들을 찾아 나선다. <솔로모스의 봉쇄된 자유>라는 세 번째 프로젝트는 아내가 사망한 이후 미완성에 그쳤고, 멈춘 이유 또한 스스로 명확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찾으려는 시어와 인생의 답은 자신에게 있었다. 그것을 외면한 것인지 몰랐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알렉산더에게 내일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현재 자신을 덮은 고독과 죄책감은 자신에게서부터 출발했음을 너무 늦게 깨달은 탓일까. 모든 선택이 "아르가디니"했지만 끝내 깨닫게 되며 아름다운 시구를 안고 하루지만 영원할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외침에 뒤돌아 보지 않는다. 그 진리를 깨달은 순간, 안나가 말했던 영원과 하루는 하나가 되어 하루는 영원이 되고, 영원은 하루가 된다.


하루가 아닌 영원을 살아간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영원과 하루>는 1998년작 영화이며, 제51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단어의 향연이 주위를 맴돌면 맴돌수록 더욱 영화의 깊은 세계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끝없는 물음은 그저 물음에 그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그 질문의 대답은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먼 곳에서 찾을 필요도 없었던 이 시어들은 인생을 관통한다. 코폴라, 세니떼스, 아르가디니.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는 시와 같은 영화이다. 어쩌면 나와 거리가 멀다고 느껴질 이 영화를 나이가 지긋하게 들었을 때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했다. 여정을 표현하듯 움직이는 카메라의 연출이 인상 깊었다. 보아야만 알 수 있는 영화의 깊이에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삶 속에서 발견한 언어의 향취는 시가 아닌 인생을 완성시킨다.



1. 코폴라. 작은 꽃이라는 뜻으로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의 감정 상태를 말한다. 삶은 사랑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려주는 단어로, 그를 잊고 살았던 알렉산더의 늦은 후회를 상징하며 알바니아 소년과의 관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영원으로 향하게 된다.


2. 세르니띠. 망명, 언제 어디에서나 이방인처럼 떠도는 삶을 상징한다. 인간존재에 대한 말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고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유한한 삶을 받아들이고 영원으로 향하게 된다.


3. 아르기디니. 늦은 밤, 인간의 황혼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단어. 죽음 앞에서 깨달음이 늦었다고 자각하는 순간 생의 소중함이 영원한 가치로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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