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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드레 Aug 07. 2024

개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자화상 혹은 이상.

영화 <젤리그> 리뷰


우디엘런의 <젤리그>. 1983년에 개봉한 영화로 한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상을 볼 수 있으며 시대의 특성을 반영할 정도로 독특했다고 말한다. 재미있었지만 어딘가 이상한 남자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젤리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젤리그' 현상


재즈 시대, 리듬엔 비트가 실렸고 윤리 의식은 희박했으며 다양한 영웅과 무모한 묘기가 펼쳐지고 밀주와 화려한 파티가 열리던 때였다.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한 남자, 젤리그. 그의 카멜레온과 같은 변신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는 유명해졌고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게 된다. 하지만 그 영향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젤리그는 대화의 중요 이슈였고 재미있고 놀라운 이야깃거리이자 화제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얻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상의 중심이 된 그의 일상은 마치 드라마처럼 전개되지만 정작 타인과 비슷한 모습을 모방하고 주체성을 잃어가는 자신에게 자괴감에 빠진다.


사람들은 그의 일상에 집중했고 학자들은 '젤리그' 현상을 분석한다. 그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만큼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다. 플레처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연구하여 발표하지만 그녀의 연구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과학자들은 공상일 뿐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렇게 증상에 차도가 없던 젤리그에게 실험약제를 투약하여 괜찮아지던 중 이복누이의 퇴원 요청으로 실험은 중단된다. 이복누이와 그녀의 애인에 의해 상업적으로 이용됐고 부자가 됐지만 그는 점점 엉망진창이 되고 있었다.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플레처는 다시 젤리그를 만나게 된다.



어떤 집착은 시야를 좁힌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사람들에게는 더 중요했다. 많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여론이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고 그 혼란은 더욱 커지게 된다. 그가 다시 분열되면서 숨고 싶은 욕망에 의해 종적을 감추고 사랑의 열망에 의해 그는 다시 돌아오게 된다. 대중들은 관심, 굴욕, 애정을 반복하며 용서를 베풀었다. 평생을 병으로 인해 괴로웠지만 병으로 인해 젤리그는 영웅이 되면서 지극히 평범한 남자가 되었다. 타인에게 동조하고 다른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하며 '조화'를 이루게 된 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가 된다. 결말은 비극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주체성을 되찾고 사람들과 조화로운 삶을 바랐던 그에게는 적응하는 현재가 최고의 결말이 아닐까.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대중 혹은 만인의 사랑이 아닌 단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될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될 수 없었던 남자.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남자. 주체성을 되찾았지만 무언가에 이용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과연 그가 찾은 것이 주체성이 맞을까. 그는 남 다른 개성으로 인해 이목을 받았지만 그 '다름'으로 인해 많은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심지어 세상에 조화되어 소속감을 가지고 싶은 생각을 했지만 쉽지 않았다. 용서도, 관심도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유명하다는 이유로 감당해야 할 것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대중의 흥밋거리 혹은 가십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을 한 <젤리그>는 다큐멘터리처럼 구성되어 있지만 모큐멘터리 영화이다. 익명의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대중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영화에 그대로 드러난다. 모순적이고 이중성이면서도 순식간에 바뀌는 여론의 모습을 보면 확실히 이해가 간다. 사람들의 열광과 환호, 분노와 비난은 확연히 다르니까. 그러한 불편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회와 사람은 분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가치관을 확립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하면서도 막상 '다름'의 모습을 보이면 극도의 거부감을 표출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으면서도 냉혹하다. 때론 다양성과 개성을 잃어가는 사회에서 '튀는' 모습을 보이면 긍정적인 반응도 물론 있지만 다름에서 오는 거부감을 그대로 표출하기도 한다.


 긍정적인 반응도 물론 있지만 부정적인 반응 또한 상당하다. 하지만 개성과 주체성이 사라진 모습이 카멜레온과 같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신을 잃고 상대방에게 맞추는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막상 나의 모습을 나만의 개성으로 꾸리려고 한다면 힘들겠지만 그저 자신의 기준에 맞춰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내는 우리 앨런의 행보를 기억한다면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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