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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가며 마주하는 나의 고통.

영화 <리얼 페인> 리뷰

by 민드레


제시 아이젠버그 감독이 연출한 영화 <리얼페인>은 2025년 1월 15일 개봉했다. 배우 엠마 스톤이 제시 아이젠버그의 첫 연출작 <웬 유 피니시 세이빙 더 월드> 제작 참여에 이어 두 번째 연출작 제작에도 참여했다. 제40회 선댄스 영화제 왈도 솔트 각본상 수상 제76회 골든 글로브 남우조연상(키어런 컬킨)을 수상하여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정반대의 사촌이 여행을 떠나며 생기는 일을 담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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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는 공항으로 향하며 벤지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건다. 몇 분에 한 번씩 메시지를 남기지만 상대방은 무응답. 도착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데이비드를 벤지가 안으며 놀라게 한다. 오랜만에 만난 동갑내기 사촌인 데이비드와 벤지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홀로코스트 가이드 투어에 참여하게 된다. 어렸을 때는 친하게 지낸 사이였지만 오랜만에 재회한 만큼 성격, 취향 심지어는 삶의 태도까지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내향적이고 소심한 데이비드와 외향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벤지의 불편한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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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방황하는 벤지를 위해 할머니의 고향인 폴란드에서 진행되는 홀로코스트 투어를 제안한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홀로코스트 투어에 참여했고 벤지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단체 관광에 참여한 사람들과 곧바로 친해진다. 유쾌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친밀하다가도 강제수용소행 열차에 몸을 실었던 선조들을 생각하면 기차 일등석에 탈 수 없다며 맨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때론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벤지지만 별다른 지적 없이 그를 그저 바라볼 뿐이다. 지나치게 솔직해서 사람들 간의 긴 침묵을 연출하는 낯부끄러운 상황이 펼쳐지는 불편한 장면도 있었지만 그러한 불편함을 감내하면서도 진정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건설적인 대화가 이루어져서 무척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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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는 솔직하다 못해 자신에게도 무례하기까지 한 벤지에게 왜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걸까. 그리고 왜 불안한 표정으로 벤지를 응시하는 걸까. 영화가 전개되며 데이비드와 벤지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밝혀진다. 유쾌하고 친화력 넘치는 벤지는 사실 고통과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데이비드는 이런 상황에 처한 벤지를 어떻게 할지 몰라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데이비드는 갑작스러운 감정변화로 돌발행동을 보였고 그런 모습을 본 데이비드는 울컥하며 과격한 감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기엔 이상하지만 힘든 일을 겪으며 우울감에 빠진 벤지의 편을 들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보였던 데이비드는 가정을 꾸리고 착실하게 살지만 강박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벤지를 위해 떠난 여행이지만 그 여행을 통해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역사의 고통,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고통에 맞닿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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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땅에는 희망과 기쁨의 역사도 있지만 비극적이고 참혹한 역사 또한 존재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라고 할 수 있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수많은 예술 작품과 영화를 통해 다루어지고 있고, 잘못과 반성을 거듭하며 그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시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역사는 그 자리에 멈춘 듯 굳어버렸지만 세상은 빠르게 흘러간다. 하지만 과거의 흔적은 현재와 미래를 향한 발걸음 속에서도 여전히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해야 함을 알려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벤지는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고통은 멈추지 않고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슬프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아픈 역사를 기리는 투어인데 가이드가 사전처럼 정보를 읊는 것 같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단순한 정보로 전달되기엔 홀로코스트에 담긴 역사의 고통이 무척이나 깊기 때문이다. 고통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마땅히 주어져야 할 고통의 시간을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또 다른 고통을 낳는다. 고통은 결코 무뎌지지 않기에 진짜 고통 (real pain)을 마주하며 진정한 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데이비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직접 보지 못했던 벤지의 표정과 듣지 못했던 내면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부디 벤지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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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크게는 역사, 작게는 사람에 대한 다양한 고통을 다루고 있다. 고통이라는 것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직접 느끼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타인의 아픔이 개인의 고통이 되어서야 깨닫기도 한다. 이처럼 아픔을 완전히 공감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영화에서는 우리가 서로의 아픔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함께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나, 그리고 우리가 연결되는 것은 쉽지만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인간의 내면은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까?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하기는 할까?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정처없이 헤매다 도달한 곳에서 느끼는 공허함에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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